성도의 세상읽기/칼럼

[김석우 칼럼] 사커맘 그리고 인신매매 여성

성북동 비둘기 2024. 5. 1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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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정착해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 미국을 만들었다. 13개 식민지는 영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1776년 독립을 선언했다.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지며 기본적 자유와 인권을 누린다”는 위대한 정신 하에서 이뤄진 선언이었다. 이는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이어질 만큼 당대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왕이나 귀족이 통치하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주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여는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13개 식민지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같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에 승리하여 영국군을 몰아내고, 신진 국가 '미국'의 건설에 성공하였다. 

 

  남부지역 넓은 땅에는 목화나 담배 농사를 짓는 데 노동력이 부족하였기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왔다. 농장주들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노예로 부렸다. 죄의식도 없었다. 

 

  남부의 농업지대와는 다르게 북부는 제조업이 발달하여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남부의 흑인 노예가 탈주해서 일자리 구하기가 쉬웠다. 노예의 멍에를 벗고 자주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남부와 북부의 산업구조 차이가 노예제도에 대한 대립으로 격화되었고,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월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이에 남부지역이 반대하여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4년 동안의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전사자가 70만 명, 상이군인이 3백만 명에 달하였다. 전쟁 중이던 1863년 11월 격전지 게티즈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역사적 연설을 하였다. 전쟁이 끝나도 후유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전쟁의 원인이던 인종차별도 단숨에 해결되지는 않았다. 인간사회의 관습이나 편견은 고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연두교서에서 4개의 기본적 자유(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주창하여, 1945년 유엔헌장에 반영하였다. 그 미망인은 세계인권선언을 성문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공공시설을 백인과 함께 이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그러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워싱턴 광장 링컨 기념관 앞에서 수십만 군중에게 외친 연설은 큰 울림을 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인권 신장의 시대정신을 쉽게 파악하였다. 민권법안을 추진했다. 그가 암살된 후, 후임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연방법이 흑인 차별을 법제화했던 주(州) 정부들에게 결정타를 주었다. 노예해방으로부터 99년 만인 1964년 미국 전역에서 짐 크로우 법 등 인종분리제도와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철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지역에서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권 운동은 계속되었고,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65년 알라바마 주 흑인 투표권 쟁취를 위해 셀마에서 주 수도인 몽고메리로 향한 역사적 대행진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과 같은 흑인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경찰의 강력저지로 피의 일요일이란 대 충돌을 겪었다.   

 

  민권법을 통해 차별철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로 흑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보상했다. 흑백 분리 통학버스도 사라졌다. 2008년에는 유색인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이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결실이었다. 

 

  우리 한국은 조선시대와 일제 식민지 통치를 거치면서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해방 후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나라를 세웠다. 신분과 남녀 차별을 철폐하였다. 물론 선거에서도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하였다. 스위스 같은 나라도 여성 투표권은 1971년에야 인정되었다. 선각자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지금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특히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질서에 젖어있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야말로 혁명과 다름없다. 농업사회였던 한국에서 여성 특히 소녀들은 대부분 천덕꾸러기였다. 시골의 딸 많은 집에서는 서울의 친척 집에 월급은 안 줘도 좋으니, 딸아이를 맡아달라고 보냈다. 서울의 거의 모든 가정에 식모라는 가정부를 두었다. 만원 버스의 차장도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들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일할만한 번번한 직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추진에 따라 산업공단이 들어서자, 서울의 소녀 식모들이 몰려갔다. 월급을 고향 집으로 보내면 오빠나 동생의 학비로 쓰였다. 그렇게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때 배울 기회가 없었던 세대가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고, 뒤늦은 공부로 한글을 깨치고 나서 못 배웠던 설움을 달래는 일화들을 요즈음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지금은 여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낸다. 한두 명 자녀를 둔 가정에서 아들과 똑같이 공부할 여건을 마련해준 결과다. 취업 전선에서도 여성들의 경쟁력이 더 강하다. 그러나 자녀 보육 부담 때문에 일과 육아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 저출산 사태가 벌어지는 근본 원인이다. 

 

  4월 9일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여성임금근로자는 1천만 명을 기록하여, 남성임금근로자 12백만 명에 가깝다. 그러나 임금 격차가 상당하다. 통계청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이행보고서 2024’에 의하면 한국의 남녀임금 격차는 31,2% 포인트로 OECD 35개국 중 가장 크다. 그리고 여성 관리자의 비율은 전체의 14.6퍼센트로 일본 다음 두 번째로 낮다. 진정한 남녀평등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의미다. 

 

  지금 한국의 여성 취업률은 90년대 이후 크게 늘어 60퍼센트가 되었으나, 75퍼센트를 넘는 북유럽 선진국에는 아직도 못 미친다. 북유럽 여성들은 사회활동도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각료, 기업의 CEO 중에도 남성과 동등하다.

 

  미국 사회는 인종 간의 평등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평등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인 1975년 중반 미국 중학교 체육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축구를 많이 시켰다. 한국교포들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주말에 공원에 나가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아이들이 남녀 구분 없이 축구시합을 하였다. 그들을 응원하러 나온 엄마를 ‘사커 맘(soccer mom)’이라 불렀다. 이게 바로 체육을 통한 민주주의 교육이다. 어릴 때부터 축구공을 차면서 남녀가 대등한 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인형처럼 차려입고 남성의 들러리 역할에 만족하는 데서 탈피해 나간다. 종속적이고 정형화한 일에 국한된 역할에서 벗어나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활동하도록 장려한 것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도 여성들의 적극적 활동을 자주 목격한다. 많은 여성이 열심히 운동한다. 남녀 젊은이들이 무리 지어 함께 달린다. 어머니 세대에 비해 커다란 사회적 변화다. 

 

  북한의 여성들은 어떠한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노력 동원을 위해 남녀평등을 내걸었으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하다. 고난의 행군 이후 엄마들이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서 집안을 먹여 살린다. 장마당에서 돌아온 엄마가 집안일도 모두 책임져야 한다. 남편은 빈들빈들 지내면서도 잘 돕지 않는다. 아직도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더 처참한 것은 먹을 게 없어 중국으로 인신매매된 수많은 북한 여성이다. 그들과 중국 남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탈북민의 7할이 넘는다. 하루빨리 이 비극을 종결시켜야 한다. 

 

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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