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세상읽기/칼럼

[기자수첩] 한국인 앞에 놓인 미로? '민주주의'라는 하느님

성북동 비둘기 2024. 5. 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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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결국 정부를 구성하는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선'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됐든 대한민국이 됐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정치 공동체 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보전하겠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우리 목에 칼을 겨눌 때,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때려부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
 
 
                                         박순종 펜앤드마이크 객원기자

 

공화국 최대(最大)의 축제가 끝났다.—이번에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정당별 의석 수는 전대(前代)와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지만, 지난 번 총선과 달리 이번엔 집권 여당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의힘은 참패를 맛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율사(律士) 출신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율사 출신의 여당 대표가 주축이 된 지난 2년간의 국정 운영에 대해 우리 국민은 ‘가위표’를 쳐서 보낸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국민의힘이 어째서 패배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랜 절대 왕정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를 겪으며 ‘입헌군주제’를 경험하게 됐고, 1948년 민주공화국이 세워진 후 이제는 일상 생활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숨쉬듯 사용하게 됐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사용하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인지 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민주주의’를 정의(定義)하자면 과연 뭐라 하면 좋을까? ‘민주주의’는 ‘정의’(正義)인가? ‘민주주의’는 ‘자유’인가? 그도 아니면 ‘민주주의’는 ‘다른 무엇’인가?

 

어떤 단어를 누군가가 사용할 때 그가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해 보시오’하고 요구해 보면 알 수 있다. 10년이나 된 이야기이지만, 나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어느 신부님과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신부님께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이 뭔가요?”하고 여쭸더니, 그 신부님께서는 “‘민주주의’는 ‘사랑’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고대 그리스·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 연설.

 

◇‘democracy’의 정의(definition)

동양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일본을 거쳐 수입됐다.

‘民’(백성 민)의 갑골문.

‘democracy’의 번역어인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처음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색하게 여겼다고 한다. ‘民’(민)이라는 글자는 본디 사람의 눈을 바늘과 같은 형구(刑具)로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고대 중국에서 ‘民’은 곧 ‘노예’를 뜻했다. 즉, 이 글자는 노예가 반항하지 못하게 한쪽 눈을 실명케 하는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인 ‘민’이 곧 ‘주인’으로 만드는 ‘주의’라는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번역어는 19세기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서구(西歐)에서 생겨난 만큼, 서구에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옥스퍼드 영영사전을 꺼내 표제어 ‘democracy’(민주주의)를 찾아봤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A system of government in which all the people of country can vote to elect their representatives.”

 

(나라의 모든 인민이 그들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를 함으로써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

옥스퍼드대학의 영원한 숙적 캠브리지대학에서 낸 영영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The belief in freedom and equality between people, or a system of government based on this belief, in which power is either held by elected representatives or directly by the people themselves.”

(사람들 사이에 자유와 평등이 있다는 믿음, 또는 그와 같은 믿음에 기반한 정부, 즉 선출된 대표들 또는 직접 참여에 의해 권력을 잡는 것)

권위 있는 또 다른 영어 사전인 마리암웹스터 영영사전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A government in which the supreme power is vested in the people and exercised by them directly or indirectly through a system of representation usually involving periodically held free elections.”

(사람들에 의해 한 정부의 최고 권력이 담보되고 그들에 의해 국가가 직접 운영되거나, 또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자유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을 통해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

 

그리고 이 단어는 그리스어 ‘사람들’을 뜻하는 ‘demos’와 ‘통치’를 뜻하는 ‘kratia’의 합성어 ‘demokratia’에서 기원했다는 부가 설명이 있다.

 

종합하면 ‘democracy’는 “그리스어 ‘사람들에 의한 통치’라는 단어인 ‘demokratia’에서 기원한 단어로써 오늘날에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보통선거 또는 간접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대표들로써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system)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민주주의’란 정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사랑’”이라는 그 신부님의 대답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부를 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계약론적 설명을 따르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지속되는 야만상태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만들게 된다.—물론 이는 역사적 경위에서 국가의 성립을 설명한 맨슈어 올슨의 ‘도적국가론’에 비춰볼 때 상상(想像)에 기반한 설명이라 할 것이지만, 올슨 교수의 이론까지 들먹거린다면 언설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쯤에서 생략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과 같이 보통선거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미국과 같이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되는 나라도 있다.

 

한편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주권이 군주에게 있는 한편(일본 헌법에는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고 있으나 결국 국민의 총화로서 ‘천황’이 존재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결국 일본국의 주권은 그 군주인 천황에게 오롯이 유보돼 있다고 해석된다), 군주의 통치 행위를 견제하고자 대표자들을 선출해 국회를 구성하는 방법을 채택한 나라도 있다. 즉, ‘민주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 가운데에서도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선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믿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한국인들의 가장 큰 착각일 것이다. 우선,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민주주의’—곧 대표자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한민국이 비로소 민주주의를 성취했다’라는 말이 쓰일 때 그 의미는 ‘1987년 개헌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라는 맥락으로 통한다. 바꿔 말하면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도 아니라는 뜻이 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유권자의 투표에 의한 직접 선거에 따른 방식이 아닌 국회에서의 선출이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이 됐다.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연설을 하는 모습.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한민국에서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다면, 1972년 대통령 간선제가 처음 실시됐다. 그 이전까지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야당의 도전을 이겨내며 정권을 지켜왔다. 대통령 직선제를 대통령 간선제로 바꾼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도 1970년대 데탕트 무드 속에서 국가 존망(存亡)의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니 이를 마냥 나무라기도 어렵다.

 

그런 와중에도 ‘또다른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선거로 계속해 선출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좌익들이 ‘체육관 선거’라고 매도하는 간선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국회에서는 야당의 도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민주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좌익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이전의 대한민국은 ‘민주’가 없는 ‘암흑기’였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왜곡한다. 문제는 학교 교육에서조차 ‘대통령 직선제’만이 ‘옳은 민주주의’이고 나아가 ‘대의제 민주주의’보다는 ‘직접 민주주의’가 더 옳은 체제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어디 그런가? 리씨 일가가 통치하는 싱가포르를 두고 우리는 ‘나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한국 좌익의 세계관에서 싱가포르의 민주주의는 ‘나쁜 민주주의’임에 틀림이 없을 텐데도…….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보더라도 ‘직접 민주주의’가 선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마치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망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지난 수십년간 좌익 세력이 우리 국민을 끊임없이 세뇌시킨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정부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나와 내 가정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내와 내 가족, 그리고 내 후손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게 목적이고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수단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나라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렸다. ‘민주주의’가 곧 ‘하느님’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돼도 좋다는 게 보편적인 생각이 돼 버린 것 같다.

좌익 세력은 ‘직접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 규정하면서 소위 ‘광장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헌법이 채택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만 있다면 반드시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철인(哲人) 정치가 됐든 전제군주정이 됐든 무슨 상관이랴?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는 이유는 후자의 체제에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킨다’는 목적 달성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일정 정도 증명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점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후손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됐든 대한민국이 됐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내 목에 칼을 겨눌 때,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때려부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순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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