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세상읽기/칼럼

[주동식 칼럼] 기아 타이거즈 밀리터리 유니폼이 보여주는 진실

성북동 비둘기 2024. 6. 1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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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민족이냐, 국민이냐.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의 번역을 두고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내재해온 갈등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제는 근현대사의 해석 즉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을 어디에 둘 것이냐의 명제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에서는 네이션을 ‘민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압도적이다. 이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국가의 정통성을 인종적(ethnic) 공통점이나 문화적 전승에서 찾게 만든다. 즉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반도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때 이씨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억울하게 권력을 강탈당한, 순결한 민족적 자존심의 총화가 된다. 암군(暗君) 고종이 개혁 군주가 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사유화의 상징과도 같은 민비가 조선의 국모(國母)로 성역화된다. 역사 해석은 각자의 자유이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심각한 병폐로 이어진다. 20세기 이후 한반도에 이식된 근대화의 성과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성향이 그것이다. 반일감정이 그 불쏘시개로 동원된다.

일본이 고심 끝에 아시아적 요건에 맞추어 번안하고 우리에게도 이식한 각종 근대적 장치와 개념들이 많다. 조선민사령을 근간으로 한 법치가 대표적이지만 교육, 의료, 도로와 전기 및 통신 등 사회적 인프라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밖에도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일본의 자취가 없는 게 없다. 문제는 반일감정을 무기로 하여 이들 근대적 요소에 대한 평가절하와 심지어 무효화에 나서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정착하여 잘 사용하고 있는 일본식 용어들을 굳이 뜯어고치고, 멀쩡하게 자라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벚나무도 기어이 뽑고 다른 나무로 바꾼다. 일제시대에 개교하여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명문고교의 교가 가사를 뜯어고친다. 작사가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런 미친 짓의 하이라이트가 1993년 8월 김영삼의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였다. 우리 근현대사의 소중한 기념물(monument)이자 문화재가 무지몽매한 반일감정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미개와 저열의 상징이랄 수 있는 쇠말뚝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일제가 계획적으로 한반도의 기(氣)가 흐르는 요소요소에 때려박았다는 쇠말뚝 문제는 심지어 얼마 전 <파묘(破墓)>라는 영화로도 형상화되어 1천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대중문화는 민중의 무지와 편견에 기생하여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고 나아가 그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조장한다는 문화 생태계의 사이클이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대중적 무지와 편견이 엘리트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런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대한민국의 독특한 표징의 하나일 것이다.

 

반일감정에 기초한 근대적 가치의 파괴 및 부정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벚나무 뽑고 명문고 교가 가사를 바꾸는 것은 애교 수준이다. 정말 심각한 것은 근대화의 핵심 가치에 대한 부정이다. 법치, 과학, 공화정, 계약, 시장, 개인, 독립 등의 가치가 그것이다. 이런 가치가 무너지면 지난 2세기 동안의 한반도 역사는 원점에서부터 무너지고 한반도 민중의 생활은 전근대 상태로 리셋된다.

 

지인 변호사에게서 들은 얘기다. 의뢰인과 대화하면서 “계약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흔하게 듣는 답변의 하나가 “그건 계약이고...”라는 것이라고 한다. 짧은 답변이지만, 저 답변에 근대화에 대한 이 나라 사람들의 이해가 집약되어 있다. 법은 법일 뿐이고, 계약은 계약일 뿐이고, 과학 따위는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태도이다. 한방이 되살아나고 신정보다 구정(설날) 연휴가 길어지게 된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이다. 기업과 시장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고 그 대신 공공 즉 정부가 우리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개인은 언제나 집단 속 일원의 정체성으로만 이해되며 독립은 민족의 오랜 정체성인 사대모화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중국은 조선의 영원한 아버지 나라이다. 일본이 타도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화기 이후 항상 존재해왔지만 그래도 근대화 과정에서 꾸준히 일정한 수준으로 통제되어왔다. 그러다 반전이 왔다. 갑자기 반일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고, 전근대가 노력해 되찾아야 할 우리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 계기가 바로 1987년 체제의 형성이었다. 1987년 체제는 정치적으로 민주화의 전환점이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2세기 가까이 근대화의 가치에 짓눌려왔던 전근대의 낡은 관행이 되살아나는 계기이기도 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1987년 체제를 생각하면 이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명창 박동진 선생이 1990년대 초반에 찍은 CF에 등장하는 대사로 기억한다. 광고 카피일 뿐이지만 저 대사에 당시의 거대한 시대적 조류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본다. 저 ‘우리 것’이란 실은 개화기 이후 낡고 전근대적인 가치로 배척되었던 조선의 관행을 말한다. 민주화는 분명 지향해야 할 방향이긴 했지만 그 흐름 속에 전근대의 악몽이 곁들여 되살아났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민주화와 전근대의 결합이라는 기묘한 현실을 체화해 보여주는 지역이 바로 호남이다. 5.18의 상징자산을 내세워 ‘민주화의 성지’라는 위상을 독차지한 광주와 호남은 동시에 전근대적 관행과 가치를 끈질기게 되살려내는 진지 역할을 했다. 법치, 과학, 공화정, 계약, 시장, 개인, 독립 등의 가치가 호남에서 짓밟히고 왜곡됐다. 한방병원이 전국에서 가장 많고 그 시설 대부분이 나이롱 환자들 보험금 빼돌리는 용도로 쓰인다고 들었다. 개량 한복에 꽁지머리 늘어뜨린 분들도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았다. 심지어 신천지 교단의 교주는 경북 출신 이만희지만 교단의 실세들은 호남 주사파 출신들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긴 동학도 영남에서 발원했지만 실제 전투력을 얻은 것은 호남에서였다. 필자는 동학이 그 근본에서는 근대화의 가치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은 근대화 운동의 최종적 결집체이다. 즉, 근대 국민국가(nation state)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 가치는 정치·제도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근대가 지향하는 모든 현실적 가치가 보호되고 구체화되고 강화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노력이 근대화의 제도적 구현인 국민국가로 집약되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진행된, 근대화를 향한 모든 피와 땀의 최종 결실이 대한민국이라는 얘기이다.

 

호남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과정에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소외감과 5.18에 따른 피해의식 때문인지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그 가운데 단적인 사례가 바로 국군에 대한 호남의 태도이다. 정율성 기념관 문제도 비슷한 유형이지만,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의 밀리터리 유니폼 문제도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임건순 작가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나라 프로야구 구단들은 현충일이나 6.25에 호국의 공훈·순국선열들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밀리터리 유니폼(military uniform, 군복 문양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한다고 한다. 6일부터 8일까지 홈 3연전을 통째로 밀리터리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광주광역시에 프랜차이즈를 둔 기아 타이거즈다. 이 팀은 심지어 1999년까지는 5.18에 아예 광주 홈경기를 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밀리터리 유니폼 착용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만약 기아 구단이 결단해서 밀리터리 유니폼을 입고 경기했다면 ‘학살 옹호하는 거냐’는 반응이 100% 나왔을 것이다. 2017년에 기아 구단도 밀리터리 유니폼을 제작했지만 결국 착용하고 경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LG 트윈스의 2020년 밀리터리 유니폼
 

근대 국민국가는 과거 왕정 국가나 봉건국가와 달리 지배-피지배 계급의 구분이 없다. 인민(people)이 국가의 기본 집단이 되는 것이다. 과거 지배-피지배 계급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기에 병역은 지배 계급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무력은 바로 이들 유산계급 즉 시민이 중심이 된 중무장 보병 집단이었다. 자기 돈으로 직접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집단이 나라의 주인이었고, 그 오너십의 표현이 병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까지 귀족 계급만이 장교가 되는 전통이 남아있었다.

 

근대 이후에는 이런 계급 구분이 사라졌다. 적어도 헌정적으로는 그렇다. 이렇게 나라의 주인이 된 인민의 법적 자격의 명칭이 바로 국민(nation)이다. 그리고 이 국민 된 자격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병역 이행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다. 그리고 의무와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엄밀하게 말해 병역의 의무를 마치지 못한 자는 권리도 포기하는 게 맞다. 최소한 공무 담임권에서는 배척하는 게 정의롭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부터 시작해 9급 공무원까지도 병역을 마차지 못한 자에게는 자격이 주어져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야 이런 원칙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여성의 경우 이 문제는 암묵적으로 출산과 trade-off 관계로 이해되어왔다. 즉, 여성이 국가의 병역 자원을 생산하는 것으로 병역을 사실상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묵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묵계는 유효하지 않고, 근원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여성들이 사실상 결혼도 출산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 여전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를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페미니즘의 허구의 조작 논리를 깨트려야 한다.

 

호남의 청년들이라고 병역 의무의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호남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 호남인이라는 정체성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고향인 호남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매향노(賣鄕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매향노라는 말은 아마 ‘매국노(賣國奴)’ 단어의 한 글자만 바꾼 것일 텐데, 매국노라는 단어는 현대에 들어와 헌정적으로 절대적인 위상을 갖는 국민국가의 존엄성을 전제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이런 반국가 사범을 부르는 명칭이 ‘역적(逆賊)’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필자를 매향노라 비판하는 자들은 호남을 그 근대 국민국가와 동열의 위상에 올려놓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호남의 전근대성과 왜곡 및 오만이 심각한지 보여주는 현상이다. 기아 구단의 밀리터리 유니폼 사례도 비슷하다. 결국 호남 스스로 근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그건 호남에게도, 대한민국에게도 비극이다.

호남의 전근대적 성격도 정치적으로 표현된다. 바로 반(反)대한민국, 친북종중 성향이 그것이다. 한반도의 근대화는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던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노력이 얼마나 처절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요구했던가. 6.25 건국전쟁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호남은 스스로 근대화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걷어차고 친북모화(親北慕華)라는 전근대의 가치로 회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내부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갈등의 뿌리에는 호남이 있다. 대한민국과 호남의 전면전이 진행 중이고 그 결과가 대한민국의 호남화 현상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대한민국이 패배하면 한반도 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상태로 전락한다. 북한 김씨조선의 인민들이 그 상태를 잘 보여준다. 호남이라고 다를까? 호남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처지로 굴러떨어진다. 영원한 역사적 죄인이 되어 두고두고 한반도 다른 지역 주민들의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호남의 후예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현재 호남의 선택에 대해 두고두고 이를 갈며 분노하고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이 발언은 호남의 예고된 비극을 막아보고자 하는 최후의 노력이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前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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