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세상읽기/칼럼

[김용삼 칼럼] 얼음조각 연대(氷雕連)·고양이 귓구멍 땅굴(猫耳洞)을 아십니까?

성북동 비둘기 2024. 6. 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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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군대와 싸워 무승부 기록한 미군

필자가 6·25를 공부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중공군은 이 땅에서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부분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자기 장남 마오안잉(毛岸英)까지 한국전에 내보내 미군과 맞장을 떴다. 당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지 겨우 1년 되는 시점이었고, 중국 변방에선 국민당군 패잔 세력에 대한 토벌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의 저자이자, 6·25 때 중공군 보급 총책임자였던 홍쉐즈(洪學智) 이 전쟁은 아군(중공군)이 현대적 무기와 장비를 갖춘 상대와 죽음을 무릅쓰고 벌인 결전이라고 정의했다. 홍쉐즈의 증언처럼 중공군 무기·장비는 미군에 비해 크게 열세였다. 보병은 박격포 몇 문, 중공군 각 부대가 보유한 70 이상 화포는 190문에 불과했다.

국공 내전에서 200만 국민당 군대가 마오쩌둥 군대에게 항복했다. 미국이 장제스(蔣介石)에게 지원한 M1·카빈 소총, 105 , GMC(트럭) 등 미군 차량이 고스란히 공산군에게 노획되었고, 중공군은 미제 무기·장비로 한반도에서 미군과 싸웠다. 중공은 정규 공군부대가 없어 공중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유엔군의 공중공격에 대항할 대공무기도 턱없이 부족했다.

 

6.25 당시 한반도에 건너온 중공군 보급 담당이었던 홍쉐즈. 그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전투는 장비와 인력의 싸움이었다고 증언했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전투는 장비와 인력의 싸움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미숫가루와 방망이 수류탄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는 누구도 확고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휴전으로 마무리됐다. 세계 최강 미군이 농민군대라고 얕잡아 본 중공군과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은 거지 군대나 다름없는 중공군에게 왜 승리하지 못했을까?

 

#. 맥아더의 오판

우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오판을 들 수 있다. 1950 10 19일부터 대규모의 중공군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와 북진하는 유엔군의 퇴로를 빈틈없이 봉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은 없을 것으로 단정했다.

맥아더는 공개석상에서 중공은 혼란기를 틈타 중국 전역을 장악했으나, 공산정권 선언 9개월 밖에 안 돼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설령 동원한다 해도 중공군은 잡군(雜軍)이며 무기도 형편없고 탄약도 충분치 못하다. 저들의 경제가 살아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무슨 재력으로 한반도에 파병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판단은 큰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두 번째로는 조선 파견 중공군(그들 주장으로는 조선 지원군) 지휘부 제거작전의 실패다. 미 정보기관은 중공군 지휘부를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특공대를 적 후방에 침투시키거나 정찰기를 동원하여 탐색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 사령부가 평북 동창군 대유동 금광에 설치된 사실을 파악했다.

 

마오쩌둥은 자기 장남 마오안잉을 펑더화이의 러시아 통역 겸 참모로 한국전에 내보냈다. 마오안잉은 한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왼쪽이 마오쩌둥, 오른쪽이 마오안잉.

 

1950 11 25일 새벽 5, 미군 전투기 10대가 대유동 금광 근처에 설치된 중공군 사령부 건물에 100여 발의 폭탄과 네이팜탄을 퍼부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를 비롯한 주요 참모들은 폭격 직전, 산기슭의 방공호로 대피하여 목숨을 건졌다. 펑더화이의 비서 겸 러시아 통역으로 한반도에 건너온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과 사령관 참모가 숙소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현장에 있었던 홍쉐즈의 기록에 의하면 마오안잉은 기밀서류를 들고 나오기 위해 사령부 건물로 간 사이, 공격을 당했다. 잿더미에서 끌어낸 그의 사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탔다고 한다.

하지만 마오안잉의 사망 장면을 다르게 주장한 기록도 발견된다. 전기 작가 텅쉬옌(滕叙兖) 2014년 봉황망(鳳凰網)과의 인터뷰에서, “마오안잉은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사령부 건물에서 박일우가 펑더화이에게 선물한 계란으로 볶음밥을 해먹다가 당했다고 증언했다. 장남의 전사 서식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아들 시신을 조선 땅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묘역은 평남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능원에 마련되었다.

 

#. 11 28, 중공군 판 인천 상륙작전 성공

중공군 사령부가 폭격을 당한 11 25, 중공군은 북진하는 유엔군을 포위망에 가두기 위해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무기·장비·전술 면에서 크게 뒤지는 국군 1군당 방어지역을 강타, 전선에 구멍을 냈다. 이후 전광석화처럼 기동하여 유엔군 전선을 무너뜨리고 미 2사단을 운산에서 포위했다.

유엔군은 막대한 군수물자를 포기하고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최신형 트럭 1,500대를 빼앗겼다. 유엔군은 이 트럭이 적의 보급물자 수송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맹폭을 가했다. 그 결과 1,300여 대가 철저히 파괴되었고,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것은 200여 대에 불과했다.

기세등등하게 북진을 거듭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기습으로 전선이 붕괴되면서 수원-삼척 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때의 제2차 공세를 전사 연구가들은 중공군 판 인천상륙작전으로 부를 정도로 중공군은 6·25에서 가장 큰 승리를 기록하게 된다.

중공군은 1·2차 공세의 승리로 유엔군을 38선 아래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응전으로 10만여 명의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중공군 제3야전군 산하의 최정예인 9병단 15만 병력은 방한복도 없이 혹한에 내몰렸다. 그 결과 미군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해 매복해 있던 중공군 부대가 강추위에 얼어 죽어 빙조련(氷雕連), 즉 얼음조각 연대란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은 방한복도 없이 혹한에 내모는 바람에 3만여 명이 얼어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들은비참하게 얼어죽은 병사들을 '얼음조각 연대', 즉 빙조련이라 불렀다.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중공군 9병단은 20일간의 전투에서 15만 병력 중 4만 명이 소멸했다. 그 중 동상자·아사자가 2 8,954명으로 집계되어 9병단은 이후 몇 달 동안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12 14, 9병단 병참부장 관종리(官宗禮) 동상과 기아, 양식 결핍 현상이 보편적이다. 동사와 아사, 특히 최장 9일간 양식을 먹지 못해 발생한 비전투 감원(아사)이 전투 감원(전사) 2배에 달해 전투력의 심각한 손실을 초래했다라고 보고했다. 이것이 중국이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만들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승리를 선전한 장진호 전투의 실상이다.

 

#. 38선 돌파는 중공군의 치명적 실수

중공군은 1·2차 공세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주력을 섬멸하지 못했고, 압록강 국경에서 최전선까지 보급선이 길게 늘어져 큰 애로가 발생했다. 펑더화이는 중공군이 계속 남진하면 유엔군이 측면이나 배후에 상륙할 가능성 때문에 38선 아래로의 추격을 정지시켰다.

 

유엔군을 추격하던 펑더화이는 보급선이 길어지고 유엔군의 측면 혹은 배후 상륙을 우려하여 38선에서 부대를 정지시켰다. 사진 왼쪽이 펑더화이, 오른쪽이 김일성.

 

이렇게 되자 주 북한 소련 대사 라주바예프가 발끈했다. “전투에서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다니, 이런 엉터리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소련 측에서 적을 계속 추격하여 부산까지 밀고가 바다에 빠뜨려라는 의견이 빗발치자 마오쩌둥은 중공군의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3차 공세로 중공군과 인민군은 1951 1 5일 낮 서울을 또다시 점령했다. 이날 밤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는 대대적인 전승 축하 행사가 열렸다.

중공군이 유엔군을 37도선 아래로 밀어내자 유엔은 조기 정전을 추진했다. 이때가 정전의 적기였다. 중공군의 전쟁 목표는 속전속결로 미군을 38선 이남으로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반 승리에 도취된 마오쩌둥이 이를 망각하고 계속 유엔군을 몰아붙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 밥 대신 미숫가루 먹고 싸운 중공군

중공군은 원론적으로 보급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부대였다. 미군은 병참요원 13명이 병사 1명의 보급을 담당한 반면, 중공군은 병참요원 1명이 병사 10명의 보급을 책임졌다. 게다가 유엔군은 중공군 보급을 방해하기 위해 파상적인 공중 공격을 가했다. 중공군은 7개월 반 동안 미군 공습으로 트럭 3천여 대를 잃었다. 그 결과 중공군 병사 1인당 30~35kg의 보급품 짊어지고 전투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중공군이 지상에서 취사를 위해 작은 불을 피우거나 양초 한 자루 불빛만 보여도 득달같이 나타나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거듭된 공중 폭격으로 중공군 부대의 식사가 큰 문제로 대두됐다. 중공군은 보리· ·옥수수를 볶아 가루로 만든 미숫가루를 야전식량으로 공급했다. 중공군 병사들은 미숫가루 자루를 등에 지고 다니다 아무 때나 한 줌 입에 털어 넣으면 그것으로 식사 끝이었다. 중공군은 한반도에 대부대를 투입한 결과 미숫가루를 1인당 정량의 3분의 1씩만 공급해도 매월 7,410톤이 필요했다.

 

중공군의 야전식량 자루. 미숫가루를 넣어 목에 두르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꺼내 먹었다. 미숫가루가 중공군의 식량이었다.

 

중공 당국은 전선에 미숫가루 공급을 위해 비상령을 내려 남녀노소를 동원했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중앙당 지도자들과 함께 미숫가루 제조에 나섰다. 미숫가루는 영양성분이 단순하고 비타민이 모자라 오래 먹으면 구강염이 발생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육포를 병사들에게 공급해야 했다.

 

#. 보급 부족으로 빈사상태 빠진 중공군

미 정보부대는 베이징과 북한을 연결하는 서해 해저전선을 도청한 결과 중공군은 20분 공세에 1,900톤의 탄약을 소비하지만 보급 능력의 한계로 절반밖에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보급 한계에 부딪친 중공군은 전투능력이 현저히 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방한용구 부족으로 중공군 병사 대부분이 손발에 동상이 걸려 수류탄 핀도 못 뽑을 정도였다. , 추위로 박격포 포신이 수축되어 탄약의 70%가 불발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워커 미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신임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중공군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 후 유엔군 주력부대를 밀집대형으로 고르게 진격시키며 소모전을 전개했다. 중공군은 이를 자석작전이라 명명했다. 지평리에서 소수의 미군과 프랑스군이 압도적 다수의 중공군 공격을 맞받아쳐 승리했고,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도록 접근전을 전개했다.

중공군은, 보급 부족으로 고전하며 38선 북쪽으로 퇴각했다. 유엔군은 1951 4 10일 임진강-양양을 잇는 캔자스선에 도달했다. 이것이 실패로 끝난 중공군의 4차 공세다.

중공군의 5차 공세는 1951 4 22일부터 6 10일까지 50일 동안 진행됐다. 5차 공세를 준비하던 1951 4, 중공군 사령부가 미군 정보망에 탐지되었다. 이때도 유엔군 전투기는 펑더화이 집무실에 네이팜탄을 명중시켰다. 펑더화이는 재빨리 방공호로 대피하는 바람에 또다시 목숨을 건졌다.

 

화천 저수지에서 국군 6사단이 중공군을 섬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기념탑.

 

5차 공세 초기에는 중공군이 기세등등하게 치고 내려와 홍천 일대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탄약과 식량인 미숫가루가 완전 바닥나 동력을 상실하자 유엔군이 강력하게 맞받아쳤다. 이때 중공군 60군 산하 180사단이 화천 저수지에서 장도영 장군의 국군 6사단에 포위되었다. 중공군 180사단은 화천 저수지에서 완전 섬멸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 저수지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 하여 파로호(破虜湖)로 이름을 바꿨다.

 

#. 지구 한 바퀴 반 길이의 지하 만리장성 굴착

1951년 여름부터 전선이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되어 참호전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1951 7월 한반도 북부에 40년 만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 기회에 유엔군은 공군력 총동원, 신안주-개천-평양 삼각지대를 장기간 무차별 융단 폭격하여 중공군 전투역량을 말려버리는 질식전을 전개했다.

유엔군은 매일 평균 32~64대의 항공기를 출동시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도·도로·교량·인원·물자·차량을 폭격했다. 그 결과 1951 9~12월 신안주-개천-순천 삼각지대로 한 달 평균 1주일 정도만 열차 통행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중공군은 보급선 보호를 위해 전선에서 북·중 국경까지 1만여 개의 대공초소를 1~3km 간격으로 설치하여 밤낮으로 유엔군 전투기를 감시했다.

한편에선 미군 포격이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하갱도 굴착 작업을 시작했다. 1년여에 걸쳐 야전삽으로 묘이동(猫耳洞), 즉 고양이 귓구멍 모양, U자형·H자형·닭발형 갱도를 겹겹이 건설했다. 갱도 안에 숙소는 물론 탄약 및 식량창고, 취사실과 화장실, 도서관까지 설치해 미군의 공격을 피했다.

 

유엔군의 폭격과 공중공격에 대비하여 중공군은 고양이 귓구멍 모양의 지하갱도를 곳곳에 뚫었다. 갱도 길이를 다 합치면 지구 한 바퀴 반에 이를 정도였다. 중공군은 이것을 고양이 귓구멍 땅굴, 즉 묘이동이라 불렀다.

 

1952년 가을, 임진강~고성까지 250km 방어선에 중공군이 7,789, 인민군이 1,730개의 갱도를 완성했다. 갱도의 총 길이를 합치면 지구 한 바퀴 반에 해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이를 기적의 지하 장성으로 명명했다. 대대적인 갱도 건설의 결과는 인명피해 감소로 직결되었다. 1951년 하계작전 당시 유엔군 포탄 40~60발에 중공군 1명이 살상하는 비율이었다. 지하갱도 완성된 1952 1~8월의 경우 평균 680발에 1명 살상 비율로 중공군 생존율이 10배 이상 늘었다.

얼음조각 연대(빙조련)와 고양이 귓구멍 땅굴(묘이동),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군과 농민군대 중공군이 무승부를 기록한 결정적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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