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살 수도 없다. 따라서 하늘나라를 지향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에 안 보이는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여 실패한 세속적인 인물들에 대한 실례도 많다.
롯의 아내는 세상과 물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결국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야곱의 딸 디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자신은 수치를 당하고, 상대편 가족은 전체가 학살당하는 비극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아간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건을 사사로이 훔침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돌에 맞아 죽게 된다. 삼손은 육체적인 정욕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결국 여인에게 속아 사사로서의 영예로운 모습을 상실한 채, 두 눈이 뽑히고 짐승처럼 취급받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환으로 있었지만, 사사로운 물질적 탐욕으로 스승을 속이다가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으나, 탐욕과 인간적인 생각에 치우쳐 있었던 까닭에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겼으며, 결국엔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교인이었으나 물질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성령을 속이다가 부부가 함께 죽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인물들이다.
성경 인물 가운데 이 같은 부정적인 인물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면교사(正面敎師)로서의 인물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도 그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영적으로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사도행전 4장의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소개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나누는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누가가 이미 앞서 행2:42-47에서 소개했듯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대단한 일치 화합을 부각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물질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책임진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공동체의 이같은 삶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참된 삶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하여 이기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들의 삶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외부적으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내적으로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서, 천국의 모형인 교회의 가장 원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땅의 교회들이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모습을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모범적인 초대교회 성도의 대표로서 바나바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는데, 바나바는 구브로 섬에 근거지를 둔 레위인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자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맡김으로써, 물질적인 헌신을 통해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바로 이어 행5장에 들어오면, 바나바의 재산 헌납과 대조되는 사건이 소개된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교인 가운데 유대인 부부가 있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었고, 그 아내 삽비라라는 이름은 ‘청옥’이라는 뜻으로 ‘아름답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름으로 보건데, 저들은 헬라파 유대인이 아니라 본토 출신의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보인다.
성경 본문에 보면, 이들 부부는 서로 합의에 의해 재산을 처분하여 바나바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런데 그 소유를 판 것에서 얼마를 감추고,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 헌납하였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1) 왜 이들 부부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헌납했느냐 하는 점이다. 즉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재산을 처분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일이 매우 귀한 일임을 알았던 것 같다. 특히 재산을 헌납하여 존귀하게 된 바나바와 같이 되려는 허영과 명예욕이 그들로 하여금 소유를 팔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 또한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저들은 처분한 재산 중 일부를 남겨 두고 나머지를 전부인 양 속여서 사도들 앞에 내놓게 된다. 다시 말해 저들이 헌신한 동기가 믿음과 사랑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명예욕, 허영, 사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그러면, 초대교회에서는 꼭 전 재산을 헌납해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베드로사도가 아나니아에게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임의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재산 처분한 것 중 일부를 남겨두고, 나머지를 교회에 바친다고 해서 잘못될 것이 없었다. 아니 재산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재산 헌납 행위는 강제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저들은 그 소유를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분한 재산의 일부를 몰래 감추었던 것은 분명 저들의 그릇된 동기와 의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감추매’라는 단어는, 구약 시대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 아간이 전리품의 일부를 몰래 ‘취하였다’는 히브리말과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는데, 이를 통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아나니아의 죄가 아간의 죄악에서 보듯 명백한 범죄 행위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저들은 명예와 재물을 모두 소유하려다가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는 죄악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3) 그러면, 왜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질책하였을까? 베드로의 질책 내용을 살펴볼 때, 아나니아의 잘못은 재산 처분액의 일부를 헌납했다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일부를 전부인 양 위장했다는 점에 있음이 분명하다. 즉 저들 부부는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바나바처럼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 공동체에 바쳤다고 하는 감명을 성도들에게 일으키려고 했다. 따라서 자신의 재산 처분액의 일부를, 마치 전부인 것처럼 거짓말함으로써, 단순히 베드로를 속인 차원을 넘어서 초대교회 공동체 전체와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과 성령을 기만하고 모독한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아나니아의 범죄를 다음 여섯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①하나님을 업신여긴 죄 ②성물을 바치는 일을 거짓되게 행한 죄 ③허영심에 치우친 죄 ④거룩한 교회에 오점을 남긴 죄 ⑤불신앙 ⑥외식한 죄 등이다.
● A.D.30년경 초대교회의 태동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복음이 폭발적으로 선포되며, 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회심한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전 재산을 바쳐서 그것을 나누어 쓰는 공동체 생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성령기만 사건은 자칫 초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칠 뻔한, 더 나아가 복음 전파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서로 합심 단결해야 할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그 단결심을 해치는 등의 심각한 상처를 줄 뻔했던 사건이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 역사 가운데도,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분리하고 불신하고 속이는 마음을 넣어줌으로써 교회를 깨뜨리고자 획책하였다. (사실 행5:11에서 누가는 처음으로 ‘에클레시아’(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이러한 계획을 아시고, 그 시도를 엄단하심으로써, 처음 시작되는 교회를 깨끗하게 정화하셨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가난한 믿음의 형제들을 도우려는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속적 허영심과 자만심의 충족을 위해 소유를 드림으로써 결국 성령을 속이고 급사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이처럼 진정으로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거짓과 위선된 헌신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뿐더러 또한 가증히 여기신다. 순간적인 허영이나 자만에서 비롯되는 구제나 헌신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교인들 가운데 서원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저렇게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헌금하기로 작정합니다. 저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할 것을 서원합니다. 성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같은 서원은 목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하는 것이요, 성령님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부족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억지로 무엇을 내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서원한 것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함부로 조급하게 서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사랑한 이들 부부의 불행한 최후는 두 마음을 품는 위선자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세상 권력과 물질, 쾌락에 대한 욕심을 끊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자들의 최후도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와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섬긴다는 뜻이다. 여호수아의 권고처럼, 하나님과 세상 신 중 하나를 택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은밀히 그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한 채 인간적인 수단으로 사도들을 속였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들은 결국 성령을 속인 죄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인간의 궤계는 인간의 눈가림은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까지 기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속일 수 있고 기만할 수 있지만, 성령은 속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든지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거짓을 꾸미기 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기울여 진실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의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행해야겠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교회는 단순한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고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인간의 거짓된 죄악들은 하나님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로서 둘 다 초대교회의 성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불신적인 모습을 바로 잡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공모하여 성령을 속이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말았다. 이처럼 믿음으로 맺어진 부부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서로에게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부추기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믿음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부부의 모습이야말로 신앙으로 맺어진 부부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가장 은혜스럽고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였지만, 위선적인 거짓 신앙 또한 존재하는 불완전한 공동체였다. 그런데 누가가 이렇게 초대교회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것은 이후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의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 땅의 교회는 그 어떤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없음을 깨닫고, 늘 깨어 기도하며, 완전한 교회, 곧 천국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고 하겠다.
'성경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인물설교(54) 스데반(행6:1-15) (0) | 2023.06.05 |
---|---|
성경인물설교(55) 빌립(행8:4-40) (2) | 2023.06.05 |
성경인물설교(57) 바나바(행11:19-30) (1) | 2023.06.05 |
성경인물설교(58) 바울(갈1:11-2:10) (0) | 2023.06.05 |
성경인물설교(59) 야고보(행15:13-21) / 박영철 목사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