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전심으로 기도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이때부터 제자들은 이전과는 달리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불과 얼마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할 때와는 완전히 형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던 예수라는 갈릴리 출신 젊은 선지자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줄 알았는데, 그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있고 한 50일가량 잠잠하더니, 유월절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부터, 숨어있던 제자들이 나타나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데, 하루에도 수천명씩 세례를 받고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예루살렘 전역에 파다했고, 마침 오순절을 맞이하여 이스라엘 땅은 물론 세계 전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형식에 묻혀 죽어버린 유대교가 아닌, 생동감 넘치는 이 새로운 복음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제자들에게로 운집했다.
저들은 오순절 절기가 끝난 다음에도 자신들의 출신지나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다. 매일 끼니때가 되면 수백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사람을 먹여야 했는데,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소유를 아끼지 아니하고, 모여든 무리를 위해 내어 놓았다.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은 자신의 집을 제공했고,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재물을, 어떤 사람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여러 사람을 위해 내어 놓았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많은 무리 가운데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갔다.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은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며 복음 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여 가두고 심문한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전혀 기탄없이 복음을 전하게 된다. 평소 같았으면, 일반 백성들은 공의회 앞에 서서 증언은커녕 제대로 고개도 들 수 없었을 터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까지도 꼼짝 못하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대제사장을 비롯, 관원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불법적으로 처형한데 따른 양심의 찔림과, 확실한 표적의 증거, 이미 이 복음을 접하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로 인해,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단지 위협만 하고 놓아 준다. 이 사건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불붙기 시작한 복음의 역사가 이제 예루살렘 당국자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탄압과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에서 처음 시작된 초대교회는 불일듯이 부흥하여 나날이 믿는 자의 수가 늘어갔다.
●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이처럼 크게 성장해가는 가운데,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처음으로 교회 조직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가 나온다.(집사라는 호칭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본토 유대땅에서 태어나고 유대땅에서 자라, 본토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이 있는가 하면, 본토 유대땅에서 태어났지만 본토를 떠나 외국에 흩어져 살았거나, 혹은 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본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들은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을 히브리파 유대인,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헬라파 유대인이라 불렀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당시 바로 이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복음을 영접하고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말기에 성전 근처에서 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과부들이 많이 있었고, 저들은 교회의 구제에 생활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매일 음식을 나누어줄 때,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밀려 구제에서 제외되자, 이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원망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소리가 더 신속히 들렸을 것이고, 또 헬라파 유대인들은 원래부터 손님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 보니, 소외되고 제외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초대교회 내부에서 최초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교회 공동체가 모이기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상존했던 갈등이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큰 집단 사이의 갈등을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군다나 사도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사명인, 복음전파에 진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대소사를 친히 주관하는 일로 인하여 복음전파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성도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교회가 보다 방대해지자, 사도들이 복음전파 이외의 교회 행정과 관계된 부수적인 문제들까지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선출하여 공정하고 효과적인 봉사와 구제를 하도록 하였다. 즉 일곱 집사 선출의 동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 일치에 큰 교훈을 주는데, 문제없는 교회가 있을 수 없지만, 문제 해결의 근본책은 이런 희생과 양보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그리하여, 교회는 일곱 집사를 택하여 세우는데, 집사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이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봉사할 수 있고, 성령께서 주신 지혜가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자격 요건은 오늘날에도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집사의 책무는,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전파에 전념하고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의 책무를 담당하였다. 물론 후에 일곱 집사의 비중이 커지면서 이들 중에는 점차 말씀 전하는 일이나 기사와 표적까지 행하는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하여튼 이것은 오늘날에도 집사를 비롯 교회 일꾼들의 책무가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봉사와 전도에 힘써야 함을 가르쳐 준다.
집사를 선출하는 방법은, 온 교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택하여졌으며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에 의해 인정되어졌다. 즉 지도자들의 일방적인 의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온 교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민주적인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 결과, 오늘 본문처럼(7절)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계속 성장하게 되었고, 심지어 복음 증거를 박해하던 제사장의 무리까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집사 선출을 통한 교회 조직의 정비는 안으로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고, 밖으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 선교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일곱 집사의 이름을 보면 모두 헬라식 이름인데, 이 말은 이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뜻이고, 그러면 왜 일곱 집사가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로 세워졌느냐? 히브리파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 없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추측컨대, 이방인들을 꺼려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달리,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 문화에 친숙하여 이방인들을 금기시하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을 것이며, 또 히브리말과 헬라말을 함께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두 선택받은 것으로 보인다.
● 이렇게 해서 뽑힌 일곱 집사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였다. ‘스데반’은 헬라말로, ‘면류관’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방 출신 헬라파 유대인이었고, 언제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유월절이나 오순절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가 복음을 접하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가족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미혼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살았지만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올 정도로 열심이 대단했던 젊은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수천명 무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었으니 분명히 출중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스데반 집사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배경에서 성장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나중에 스데반 집사의 활동(8~10절)을 보게 되면,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으며, 아시아아 근동 각지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의 갖은 변론을 감당해낸 것으로 보아 지혜와 언변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장에 보면 공회에서 변론할 때,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리 있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만큼, 말씀에 대한 열심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 앞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용기과 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을 소유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 여러분은 ‘순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총칼을 들이대고,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지금 심정으론 ‘주 예수님!’을 부르짖으며 순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사순절 영성훈련 하는 정도의 열심이면, 모진 고문도 견뎌 내며 순교의 길을 걸어갈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과거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순교자가 그렇게 많지를 않은 것일까? 목숨을 걸고 믿었던 구한말, 일제치하, 공산치하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지금 우리의 믿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순교자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은, 지금 마음으론, 죽는 것이야 한 순간인데, 잠시잠깐 그 고난의 순간에 ‘아멘, 주 예수여 나를 받아주소서.’하고 순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평소 순교자적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순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이다. 순교의 순간, 성령의 감화는 물론이거니와, 오랜 시일을 두고 이에 대한 준비가 없이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다. 즉 심한 연단과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열의가 단단히 서 있어야만 한다. 죽음을 앞에 놓고, 온갖 세상적인 애착과 두려움을 초극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자살과는 다른 것이다. 소망의 끈을 놓고 허무와 절망과 무책임과 불성실의 결과로 비롯되는,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은 분명히 순교가 아니다. 순교는 소망의 끈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도우심을 확신하며, 허무와 절망을 뛰어넘어, 다함없는 책임과 성실함 가운데 맞이하는 것이 순교인 것이다. 따라서 그같은 삶을 평소에 살면서 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순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애끓는 책임의식과 성실한 삶의 태도로 충일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순교하기 위해 순교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평소 순교자적인 삶의 마지막 순간에 순교로 나타난 것이었다.
●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어두운 사람으로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스데반은 교회의 집사로서 유능한 일꾼이었다. 하나님의 영은 지혜의 영이요 재능의 영이다. 출애굽 때 성막을 지은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손재주가 있게 되었다(출31:1-6).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불러 모든 봉사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하신다.
그런데 스데반의 지혜는 특히 그의 언변에 나타났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성경과 율법을 어기고 모세가 전한 관례를 깬 자로 고발을 받는다. 이때 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대웅변이었다. 그는 조상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고 나서, 대담하게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저들을 힐책하고, “너희들은 많은 예언자를 죽인 조상들과 같이 의인을 죽이는 자들”이라고 통박했다. 그의 언변은 성령의 권위와 능력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스데반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입장에 서있었다. 저들은 스데반의 열변에 압도되어 감히 논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화가 치밀어 이빨을 갈 뿐이었다. 이제 저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폭력뿐이었다.
순교의 순간, 스데반은 영안이 열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다. 주께서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맞아들이기 위해 일어서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는 이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늘로 개선하려는 것이다. 지상의 성난 군중의 아우성은 하늘의 개가에 삼키워, 이제 스데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스데반은 저들을 질책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을 일깨워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는 저들의 터무니없는 반발과 저주와 욕설도 귀가를 스쳐가는 먼 바람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다. 폭도들이 들고 일어났다. 돌팔매가 빗발치는 가운데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다. 선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고 오직 저들이 측은해 보이기만 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시던 바로 그 기도였다. 스데반 집사는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위대한 기도를 드리면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를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시작되어, 예루살렘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수천, 수만 교회의 시작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스데반은 몸으로 입증하며 순교했다.
● 정리합시다. 스데반은 평신도였으나 사도 못지않게 하나님의 복음의 사자로 쓰임 받았던 인물이었다. 비록 주님을 만난 적도 없고, 일찍 제자 공동체에 몸담은 적도 없었지만, 참된 믿음 생활과 성실과 열심으로 인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였으며, 복음을 선포하는 직분까지 감당할 수 있었다. “아이쿠 내가 목회자도 아닌데,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하고 스스로의 열심을 꺾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의 교회는 목회자만의 교회가 결코 아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대형교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는가? 물론 그 교회마다 목사님들의 탁월한 특기와 열심들이 있다. 하지만 평신도 사역자들의 열심히 없이는 오늘의 대형교회는 불가능했다. 1년에 1만명씩 전도하는 안강자권사같은 분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 교단에서 제일 큰 교회로 부상하고 있는 인천주안장로교회가 가능했고, 고구마전도왕, 진돗개전도왕같은 평신도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유수한 대형교회들이 가능했다. 세계제일의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경우엔, 70년대의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 할수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고난을 헤쳐나갔던 억척같은 구역장들의 헌신이 없이는 부흥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으로 복음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헌신된 일꾼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환난과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든든히 서 있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는 스데반 집사와 같은 충성된 일꾼을 부르고 있다. 항존직은 항존직대로, 서리집사는 서리집사대로, 아직 직분을 받지 않는 성도들은 그 나름대로, 초신자들은 초신자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중고등부 청소년을 청소년들대로, 은퇴하신 분들을 은퇴하신 분들대로, 교역자들은 교역자들대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 아버지 앞에 거짓되지 않게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자. 무엇보다, 온전히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에 지배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살려내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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