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55) 빌립(행8:4-40)

성북동 비둘기 2023. 6. 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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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집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크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초대교회 성도들을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이방 각지로 흩어지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복음의 확장을 가져오게 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 복음의 확장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 가운데 하나의 실례로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 집사의 사역은 스데반 집사의 사역과 함께 베드로의 유대 사역과 바울의 이방 사역의 교량적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빌립의 사마리아에서의 전도사역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서 땅 끝을 잇는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전도사역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데, 사실 유대와 사마리아는 민족적, 종교적으로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왕국의 수도였는데, 북왕국의 첫 임금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주민들이 남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여 그곳으로 제사 드리러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성소를 세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게 했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었고, 남유다에 비해 140년 가량 앞서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이때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고, 또 이방인들을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시켜 섞여 살게 함으로써, 사마리아지역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이 주로 살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처럼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통적인 예배의식에서 멀어져, 하나님을 섬기기는 했으나 이방 우상숭배와 혼합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에 귀신들린 자와 병자가 많고, 마술을 행하는 자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빌립이 참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병자를 고쳐준 사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즉 영적으로 심히 어두운 가운데 거하던 저들이 영적인 빛을 발견하게 되자, 그들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빌립의 전도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감정적인 대립이 사라지고 주 안에서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불일치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4명이 등장한다. (1)사도 빌립(10:3,3:18,6:14)(2)헤롯대왕의 아들로 헤로디아의 전남편이었던 빌립(14:3), (3)역시 헤롯대왕의 아들로 이두래의 분봉왕이었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혼인한 빌립(3:1) 그리고 (4)집사 빌립이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빌립이다. 빌립이란 이름은 헬라말로 ()을 사랑하는 자’(필립포스)라는 뜻이다.(愛馬?)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 이름도 빌립이었는데, 빌립보라는 도시는 빌립왕이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그곳을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보는 말()이란 뜻이다.

 

하여튼, 빌립집사는 앞시간에 살펴보았던 스데반 집사와 마찬가지로,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구제사업을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 뽑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빌립집사도 스데반과 같이 구제 사역뿐만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출중하여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후에 전도자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21:8)

 

그러면, 집사 빌립이 어떻게 하여 이같은 위대한 전도자의 사역을 훌륭히 감당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는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웠던 사람이었다.

 

비록 스데반집사의 순교 이후 유대교의 핍박으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거의 이방 세계나 다름없는, 어쩌면 이방세계보다 더 어려울 수 있었던 사마리아로 달려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있었더라면 교회의 직무에 얽매여 복음 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을 것이나, 주님의 섭리 가운데 그는 여러 번거로운 직무에서 벗어나 복음 전파에만 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곧 사마리아 도성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사마리아 전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는, 주의 사자의 명을 받아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길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참으로 지혜롭게 그에게 접근하여, 말씀을 깨우치게 하고, 결국 세례를 주어, 일찍이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무관리를 맡은 내시는 분명히 유대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거세당한 사람으로 유대교로 개종할 수도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 끝에서 왔으며, 또한 돌아가는 길에서도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처럼 최초의 이방인으로서, 더욱이 내시라는 율법적인 제한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기독교 공동체에 최초로 받아들여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따라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 훨씬 이전에 성령의 개입으로 이같은 상징적인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같은 놀라운 선교사역에 빌립 집사가 쓰임받은 것이다.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을 가진 충성된 사명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맡기시고,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2) 그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군중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이적을 보고 놀라 그를 따랐다. 그는 신유의 은사를 베풀어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전도에 열중했다. 사마리아 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유명한 마술사 시몬도 빌립의 말과 이적에 놀라 세례를 받았다. 박해 속에서도 마력을 무찌르는 능력이 빌립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빌립의 전도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못했으므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한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을 증거하며 저희를 위해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지금까지 빌립을 초인처럼 받들던 사마리아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질투심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아는가? 아담과 하와가 처음 얻은 자녀가 바로 가인이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물인가! 그런데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나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생 아벨을 시기질투하여 돌로 쳐 죽이게 된다. 최초의 살인은 이처럼 시기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된 인간성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이웃에 대한 시기질투이다. 그러므로 시기질투는 모든 인간에게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최대의 찬사로 보내며 따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다른 사람을 쫓아다니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어찌 사람인 이상 시기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자신이 개척하고 공을 들여 이룩해 놓은 성공적인 사업이나 업적을 남에게 넘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일어나서 예루살렘에서 가사에 이르는 황야의 길을 가라고 지시했다. ‘일어나서라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말해 깨끗이 손을 털고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빌립은 그 동안에 전도에 많은 실적을 올린 사마리아를 떠나 혼자 쓸쓸한 황야를 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르기를 꺼리는 전도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빌립은 주의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군더더기 말 한마디 없다. (27)을 보니 그냥 얼어나 가서 보니하고 기록하고 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에게 갈 때, 베드로가 의심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신다.(10:16) 베드로조차도 이러했건만, 빌립집사는 자신의 모든 성취, 수고의 결과로 이룩한 훌륭한 업적을 뒤로 하고, 광야길도 마다않고 달려간다. 빌립의 이같은 철저한 말씀순종으로 말미암아, 이후 한 나라를 복음화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 하나님의 일에 를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사람들의 칭송과 영광을 받는 자리에서 사라질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진정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수만명이 모이는 큰 교회를 이루면 뭣 하나? 나를 내세우고 나의 욕망이 교회를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복음을 들어야 할 수십만명, 수백만명의 귀를 막아버린다면, 수만명 모이는 교회를 이루면 무엇 하겠나? 참으로 빌립집사 같이, 철저히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역자가 아쉬운 시대이다.

 

3) 그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았던 사람이다.

 

빌립이 사용한 무기는 성경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며, 이 검을 잘 쓰는 자라야 참된 구령자가 될 수 있다. 자기 생각과 말을 앞세워서는 상대방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없다. 주의 사자가 이끄는대로 광야로 달려갔을 때, 빌립이 만난 것은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고관 일행이었다.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아마 대단한 위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여행할 때에 말벗이 없을 경우 하나님의 율법을 읽었으며 또 그 율법을 읽을 때에는 소리내어 읽었다. 그 이유는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읽은 내용을 쉽게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생면부지의 이방 고관에게 일개 야인에 지나지 않는 빌립이 다가가서 말을 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빌립은 지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접근하여, 읽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 묻게 된다. 뜻밖에도 그 고관은 그 위용과는 달리 순순히 빌립의 질문에 응하게 되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빌립을 자신의 병거에 올라 같이 앉게 한다.

 

빌립은 그가 읽고 있는 이사야 537-8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빌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해 괴로워하시고 수모와 멸시를 당하시고 피를 흘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십자가의 예수를 증거했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이다. 빌립은 다른 어떤 말로 고관을 설득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 에디오피아 고관이 듣고 싶었던 것도, 다른 어떤 세상적인 말이 아니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은 고관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복음을 만난 큰 기쁨 가운데 귀국의 길에 올랐을 것이다.

 

교회, 즉 교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르게 질문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가 무엇인가?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기에 하나님의 백성인가? 어려운 이웃을 돕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불신자들, 타종교인들도 얼마든지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행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가 드러나는가? 사도행전2:42 이하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예배이다(47).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둘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42).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됨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성경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셋째, 교제이다(42).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천국백성으로서의 사랑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교제가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 넷째, 봉사이다(45).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다섯째, 전도이다. 2장에는 그것이 선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전도(혹은 선교)는 주님께서 교회를 향한 지상명령이었다. 이 다섯가지가 가장 대표적인 교회의 지표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마지막 내용, 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참으로 유의해야 할 것은,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어떤 교회나 프로그램이나 어떤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턱대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면, 저쪽에서 거부하게 될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을 사람을 이미 준비시켜 놓고 계신다.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봉사하는 종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은 말씀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무기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지녀야 할 무기는 성경말씀이다. 말씀의 능력이 없이 우리는 세상권세, 악한 영의 권세를 이겨낼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40일 광야 금식기도후 시험하는 사탄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말씀이 우리의 능력이다. 빌립집사는 말씀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그 후 빌립은 아소도에서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로 돌아왔다. 가이사랴에 있는 그의 집은 사도들의 숙소로 제공했으며 네 딸들도 모두 주의 일을 열심히 했다. 빌립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40절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홀연히 사라졌다가, 가사 북쪽에 위치한 지중해 해안 마을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가이사랴에까지 이르렀다고 나오는데, 이로 볼 때,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중해 해안가의 룻다, 욥바, 가이사랴에 세워진 교회는 빌립집사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21:8확인!) 바로 가이사랴에서 전도자로 불리는 빌립집사의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된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사역의 결과

 

1. 사마리아인들이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음(8)

 

2.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나감(7)

 

3.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유받음(7)

 

4.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기쁨이 가득함(8)

 

5. 마술사 시몬을 따르던 남녀가 다 복음을 빋고 세례받음(9-12)

 

6. 백성들이 청종하던 마술사 시몬도 복음을 믿고 세례받음(9-13)

 

7.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음(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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