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36) 요나(욘4:1-11)

성북동 비둘기 2023. 6. 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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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예수님이 어릴 때 자랐던 나사렛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처음 이적을 베푼 가나로 넘어가는 도중에 요나의 무덤이 있다. 이 고대의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나서의 내용이 초자연적인 이적들이 많이 나오는 까닭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오해하기도 하나, 요나가 실재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요나선지자는 열왕기하14:25에도 등장하는데, 여로보암2세 때 북이스라엘의 지경이 회복될 것을 예언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부친 아밋대는 스불론지파의 땅 가드헤벨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가드헤벨은 나사렛 북동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신약시대의 갈릴리지방의 작은촌락이다. 그래서 요나를 갈릴리 출신 선지자라고도 말한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이다. 옛날에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 구실을 많이 했는데, 요나선지자는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로서는 최초로 이방 국가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파송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이다.

 

요나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했는데, 이미 앞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통일왕국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번영에 비견될만큼 번영을 누리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그동안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이 앗수르와의 전쟁에 크게 패하여 무기력해 있을 때,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침공하여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하였고, 앗수르는 아람과의 전쟁 이후, 앗수르 북방의 또다른 신흥국가인 아라랏과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남쪽으로 내려올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수십년동안 주변 강대국의 침략 없이 정치적 안정 속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가 있었다.

 

한편 당시 앗수르에는 설상가상으로 B.C.765-759년경에 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고, B.C.765615일경에는 완전한 일식으로 앗수르 땅이 칠흙같은 어둠에 휩싸이는 불길한 징조로 인하여 민심이 상당히 동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보면 요나 선지자가 단 하루 동안만 전파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니느웨 거민 전체가 회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요나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전에 이미 니느웨는 소위 추수하기에 적합한 희어진 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대부분 선민 이스라엘을 예언의 선포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선지서가 2권 있는데, 그것은 요나서와 나훔서이다. 요나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출신의 선지자로서 앗수르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구원의 회개를 선포하였고, 나훔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의 선지자로서 요나선지자보다 약 100년 뒤 역시 앗수르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 선지자의 예언의 대상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요나선지자 당시, 앗수르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앗수르는 여러 왕에 걸쳐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결국 앗수르는 강대한 제국을 이루었으나 나훔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요나선지자에 대해서는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먼저 요나선지자의 성품을 중심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 요나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1)요나선지자는 하나님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그 소명이 자신의 뜻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를 거역하고 소명지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인물로 보인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가 이럴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요나는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연단하며 설득하시어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제 뜻대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과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순종하고 막무가내로 제마음대로 행동했던 요나선지자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요나선지자를 용서하셨듯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시대를 살릴 사명자로 살아갈 것을 기다리고 계신다.

 

(2)그러면 요나선지자는 왜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했을까? 이스라엘의 적국 앗수르의 수도 한복판에서, 난폭한 그곳 주민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외친다는 것은 어쩌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허나 요나는 그것을 두려워 했을까? 요나는 어떻게 보면 소심하거나 비겁한 사나이는 아니었다. 폭풍이 불어닥쳐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도 허둥지둥할 때, 요나는 오히려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재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하고 솔직히 책임을 지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요나는 무엇 때문에 니느웨에 가기를 꺼렸을까? 그것은 그의 편협한 애국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저 이방 앗수르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앗수르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대 적국이었다. 도저히 자기 나라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 앗수르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멸망하게 된다면, 그 이상 더 바랄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일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회개하게 되면, 모처럼 멸망할 운명에 있던 앗수르가 다시 소생되어 장차 재앙을 가져올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염원하던 요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니느웨에 가기를 꺼린 가장 큰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는 니느웨가 부흥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로 열렬한 애국자였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과 여러분 자신의 판단이 합치되지 아니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나님 말씀은 그렇지만, 하나님! 이번만 한번 눈감아 주세요! 하고 말씀을 무시하지는 않는가? 하나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판단에 불합리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여러분은 그럴 때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는 사람인가?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대로 조급하게 말을 내어뱉고 감정을 표시하는 사람인가?

 

요나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성도답게 행동하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구원의 회개를 선포하기도 하지만,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께 원망하며, 박넝쿨이 시들어 더위에 고생이 심하자 죽기를 청하는 등 수시로 심적 상태가 바뀌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원망하다가,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참으로 미숙한 인격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요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응석을 받아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불평을 다 받아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조용히 그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자상하게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깨우쳐 주시며, 언젠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는 어떠한 인간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성취되어 간다. 비록 그 사명을 맡은 자가 거부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자는 비록 그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파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 배를 뒤엎어 요나를 바닷물에 던지고 물고기의 배에 넣어 그를 바닷가에 운반하여, 다시 처음의 사명을 이행하게 하셨다. 요나가 하나님을 거역한 기간은 하나의 낭비였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었듯이, 요나도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고자 몸부림쳤지만, 결국 험한 길을 돌아 니느웨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요나는 심판을 선포한 후, 니느웨성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언덕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요나를 더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박넝쿨이 요나의 머리를 가리게 했다. 그러자 요나는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튿날 벌레가 그 박넝쿨을 갉아 먹어 곧 시들게 했다. 이윽고 해가 떠올라 요나의 머리를 쨍쨍 내리쬐자 요나는 견디지 못해 또 다시 죽기를 원했다. 요나에게는 니느웨의 소생보다 자기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그늘 쪽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애국자 요나도 일개 이기주의자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있지 않은 애국심은, 사실은 이기심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낫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간치 못하는 자가 12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지금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자기본위의 애국자나 민족주의자들이 다시스로 행하다가 거친 바다 속에 던져지고 있다. 좁게는 우리 모두 지역사회, 집단, 가족 이기주의 등에 사로잡혀 자기만의 번영을 도모하며 아귀다툼 하는 가운데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의 자녀들이 회개하고 당신의 앞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요나는 거친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이기주의적인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아담 이후로 자기 주장의 반역성은, 지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다만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의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 것처럼, 3일 동안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의 뒤를 따라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자들만이,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사는'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생애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날은 언제일까? 만일 인류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서로 겨루고 싸우다가 거친 바다에 던져져 결국 인류는 자멸하고 세계도 붕괴될 것이다.

 

요나선지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도망치고 화를 내는 요나선지자의 성품은 친근한 느낌조차 든다. 그런데 요나선지자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히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요나서를 통해 분명히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너무 크고 신비롭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의 편협한 시각은 늘 은총 속에서도 불평과 불만을 낳는다. 잠시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감사하고 아름답게 보일까? 우리 모두는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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