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너무나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진 인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친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요셉과 이름이 같아, 가끔 혼동을 일으키는 인물로, 예수님의 부친이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을 어떤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가?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신약성경은 예수의 법적 부친인 요셉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예수의 족보다. 그런데 1:16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이자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의 족보이다. 그런데,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야곱은 요셉을 낳았는데, 요셉의 아내는 마리아였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해야한다. 성경대로 한다면, ‘야곱은 요셉을 낳고,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으니라.’고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의 족보를 기록한 후에,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지어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라고 기록하여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되면서, 성경에서 거의 ‘잊혀진 사람’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말 그러한지 이 시간 요셉에 대해 살펴보자.
● 헬라에 이어 이스라엘 땅을 로마가 통치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 이두매 출신의 헤롯 가문이 로마의 힘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 땅의 왕으로 즉위한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로마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즉 옥타비아누스)가 다스렸다. 그는 BC27년부터 AD14년까지 무려 41년간 로마의 황제로 있으면서, 로마의 평화시대(Pax Romana)를 열었다. 누가복음2장에 천하에 영을 내려 다 호적하라고 명을 내린 가이사 아구스도가 바로 아우구스투스황제이다.
정치적 수완이 좋았던 헤롯대왕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신임을 얻어 전 팔레스틴 땅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헤롯은 헬라와 로마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왕궁과 항구, 도로, 망대와 같은 중요한 건축사업을 추진했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것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이전의 스룹바벨 성전을 허물고 새롭게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헤롯은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가이사랴라는 도시를 건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헤롯은 유대인들의 세금 경감 정책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헤롯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자식들 간의 암투와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헤롯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아마 자신의 권좌를 아무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이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큰 아들 안티파터까지도 내란죄로 처형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때에 동방박사들이 방문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으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던 2세 이하의 유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광포함 때문이었다.
이같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정치적 격동기를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은, 세태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거나 방황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의 자손 요셉은 나사렛이란 조그만 시골에서 목수일에 전념하면서 소박하고 신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리아와 정혼하게 되었다.
● 유대 풍습에서 이 ‘정혼’은 오늘날과 같이 쉽게 파기할 수 있는 성격의 약혼이 아니라 매우 중대하고 강한 결속력을 갖는 약속이다. 따라서 이 약속을 파기할 수 있는 근거는 간음과 같은 지극히 제한된 이유에 국한 되었다.
한편 서로 정혼한 사이는 법적으로 부부관계로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동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유대 풍습에는 남녀가 정혼한 후 얼마의 기간(약 1년)이 지나야 비로소 동거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라도 서로의 육체를 범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아무튼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함으로써 성령으로 나신 예수는 다윗의 자손 요셉의 족보를 법적으로 이어받게 되었다.
하지만 요셉과 예수 간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들은 단지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함으로 호적상의 부자 관계가 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 법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이은 것이 확실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또한 그 관계를 뛰어넘는 신비함을 발견하게 된다.
● ‘요셉’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더하신다’라는 뜻이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며 예루살렘 근처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어떻게 해서 갈릴리 호수 인근의 나사렛이란 시골 동네에 정착했는지는 모르나,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목수였는데, 당시 목수는 집에 머물러 가재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연장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건물이나 물건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을 때 묵을 곳이 없어 고생했던 것으로 보아, 가문이 번성한 집안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 외에 나중에 마리아에게서 네 아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여러 딸들을 두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요셉은 AD14년, 즉 예수님이 10대 후반이었을 때, 마리아와 여러 자녀들을 남겨둔채 일찍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한 그의 행동 때문에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된 것이 아니라, 그의 평소 생활 자체가 그러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의로운’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정직하고 곧은 상태를 나타낸다. 즉 요셉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말씀에 의지해 정직하고 성실히 살았던 건실한 유대인 젊은이였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셉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정혼한 여자의 간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자신과의 신성한 약속을 가장 수치스럽게 파기한 마리아를 아주 관대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었을까? 보통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약혼녀가 자신도 모르게 임신한 사실을 발견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인데.
요셉은 의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의 일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결심하였다. 마리아는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이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마리아가 헤브론에 3개월 가량 가있는 동안에 요셉은 홀로 있었다. 요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온갖 상상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급히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인내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요셉이 진심으로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평생 그녀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요셉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마리아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라 성령 잉태 그 자체였다. 요셉에게 있어서 마리아의 순결에 대한 진실성은 믿을 수 있어도, 어떻게 처녀가 남자 없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믿고 싶으나 믿을 수 없는 그 일에 대한 최선의 방법이 조용히 혼인을 파기하는 것이며, 또 이렇게 함으로써 파혼의 결과로 오는 여러 가지 충격들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정직하고 곧은 인물이면서 사랑과 용서를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여호와께서는 요셉에게 신실하셨다. 요셉이 이런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잠자는 요셉에게 꿈에 천사를 보내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때 요셉은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셉이 천사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꿈에서 그 믿고 있던 일이 주의 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천사는 이사야7:14의 말씀을 언급한 것뿐이다. 요셉은 자신이 메시야의 생애의 한 부분을 수종들어야 할 것을 알았다.
그 꿈 후에 요셉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그는 천사가 자신에게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리아는 순결하였다. 그는 아들 예수의 모친이 될 자이다. 그는 기꺼이 마리아를 자기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호적을 하라는 당국의 명령에 따라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먼 여행길을 오르게 된다.
그리고 마굿간에서의 출산. 이 모든 과정의 고생은 고스란히 요셉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묵묵히 돕는다.
● 헤롯대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하였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심으로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먼 애굽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문다. 산모와 신생아를 데리고 이국땅에서 피신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이 모든 과정에서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책임성있게 직무를 감당한다.
여러 해 후 요셉은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그는 목수 일을 예수에게 가르쳤다. 예수님은 목수였다. 예수님은 그의 부모에게 순종하였다. 요셉은 양육하는 아버지로서 어린 예수에게 일을 가르쳤으며, 그와 함께 예배하러 갔으며, 그로 하여금 지혜와 키가 자라도록 하였다.
이렇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세상을 이해하며 자라는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는 물론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후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많은 부분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했던 요셉.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탕자를 기다리고 맞아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남의 허물을 크게 떠들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 내 문제는 ‘쉬쉬’하면서도, 다른 이의 허물에 대해서는 관용치 못하고 크게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생각과 감정에 갇혀, 믿음의 발걸음으로 앞으로 내딛지 못할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계산에 빠르고, 주의 일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기보다는 뒷짐지고 물러설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내와 관용을 말하고 믿음과 순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리며 기쁨과 감사의 생활이 펼쳐지기를 원한다.
요셉을 보라. 요셉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준 의인이었다. 우리 가운데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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