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창세기 4장의 내용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는 장면보다 더욱 심각하고 안타까운 범죄와 타락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타락 이후, 인간 속에 들어온 죄악은, 인간 최초의 죽음인 아벨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살인사건으로 몰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가인 계통을 주축으로 급전직하, 악화 일로를 걷는다.
●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 ‘가인’이 태어났다. 하와는 첫 아들을 출산한 후 얼마나 기뻤던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며, 인류의 첫 열매를 주신 여호와의 은총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은 자’라는 뜻으로 이름으로 ‘가인’으로 지었다.
가인은 ‘소유하다. 얻었다.’ 라는 뜻.
가인의 동생 아벨도 태어났다. 아벨은 양 치는 사람이 되었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사실 성경에는 두 사람의 제물 자체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피 흘린 양의 제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피 흘림이 없는 농산물의 제사는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농산물의 제사를 싫어하셨다면, 레위기에서 고운 가루나 기름, 유향 등으로 제사 드리는 것을 금지하셨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의 제물이 열납 된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아벨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정성껏 제물을 골라 믿음으로 바쳤기 때문에 그 제사가 열납 된 것이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을 자세히 상고하면 잘 알아차릴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즉,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 이전에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 자세, 정성, 믿음, 삶의 태도를 보신 것이다.
‘열납하다’의 원래 뜻은 ‘응시하다. 주목하다’라는 뜻 - 곧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신다는 뜻이다. 아무 제사, 제물이나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 주목하여 보사, 받으실만한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했는가? 창세기 4장에서 그 까닭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사 이후에 드러난 가인의 행동을 통해, 가인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당연히 땅의 소산물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 이때 가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니, 이럴 수가. 나 이거야 원, 창피해서 못살겠네. 내가 그래도 장남인데 내 제물은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하나님이 어쩌면 저렇게 편애하고 불공평하실 수가 있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편애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드는지를. 부모로부터, 특히 가까운 형제와 비교되어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 낙인찍히는 것처럼 큰 상처가 있을까?
가인은 하나님께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기대가 좌절될 때 화가 나는 것을 보통으로 경험한다. 때로는 극도로 분노하여 이성을 잃게 되고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화가 나는 것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스리는가’ 하는 점이다.
가인의 분노의 화살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아벨, 저놈 때문이야. 저놈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뒤틀어졌어. 저놈을 없애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미움과 시기는 어느덧 살기를 띠게 된다. 가인은 아벨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가인은 동생을 땅에 묻은 후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계속 자신이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인은 정신을 차린 후, “아니, 내가 무엇을 한 거지. 동생을 죽이다니. 내가 화를 참았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죽도록 밉고 싫어졌을 것이다.
사실 아벨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감사와 믿음의 제사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담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신 것은 공평한 처사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칭찬받는 사람 곁에 소외되고 상처받는 이도 함께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동생 아벨은 형 가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얼마나 알고 배려했을까? 내가 독차지한 사랑 때문에 가슴 시리고 아픈 이들은 혹시 없는가?
● 가인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보다 밖을 향해 있었다.
‘나는 왜 화가 났는가?’ ‘동생 아벨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가?’ ‘왜 나는 큰 잘못도 없는 가족과 형제를, 이웃을,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공격하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이유모를 분노와 폭력도 마음의 상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가 있다. 일생을 지내오면서, 참으로 험악하고 살벌한,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수많은 마음의 상처와 억압된 한이 서려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상처받은 가인이 서 있고, 피투성이가 된 아벨이 쓰러져 있다.
가인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사람은 분을 낼 수 있다. 분냄 자체가 모두 죄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때로는 의분을 내시지 않았는가? 성경은 뭐라고 권고하는가?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다시 말해, 분을 조절하고 삭이지 못하면, 즉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재해석하여 승화시키지 못한 채 계속 품고 있으면,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직접 자신의 손으로 갚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 품고 있다는 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이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를 주님 앞으로 가져와 다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능력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원망과 분노와 폭력과 파멸에서, 용서와 이해와 감사와 헌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참모습이요 믿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무엇 때문에 오늘도 날이 어둡도록 분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는가? 어떤 마음의 상처가 더욱 자신을 쓰리고 아프게 하고 있는가? 이제 고통을 감수하고 마음의 눈을 뜨자. 상처 난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자. 그리하여 결코 세상이 치유할 수 없는 그 아픔과 고통들을 주님의 인자한 품안에서 치유 받도록 하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가인을 보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돌이키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가. 6절 이하를 보라!
‘네가 왜 분을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냐? 네가 선을 행한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언제 죄에 빠져들지 모른다. 죄의 유혹이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도대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얼마나 잔소리 같을 정도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있는가!
만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말씀하시는 그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에라도, “여호와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분노에 눈이 어두워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가인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었다면 상황은 180°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어떻게 대꾸하고 있나?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결국,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한 첫 후손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회개하지 않는 독선과 분노의 화신이 되어, 일생 죄책감, 공포감, 불안감에 사로잡혀 안식 없는 저주의 삶 속으로 걸어가게 된다.
16절 이하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그들의 땅에서 나름대로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 가면서 번성해 가는 장면이다. 하지만 ‘여호와 앞을 떠난’(16절) 가인 후손들의 문명은 인간을 위한 세속적 문명일 뿐 결코 여호와를 위한 문명은 아니었다. 즉 죄의 영향 하에 놓인 교만과 타락 및 방종의 문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라멕의 노래(23,24절) 속에서 잘 드러난다. 복수하고 원수 갚겠다는 가사 내용이 극악잔인무도하다. 하지만 본문 중 우리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비록 미약하나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26절) 거룩한 씨의 역사가 이어짐을 본다. 곧 가인의 후손들에 의한 죄악과 세속의 문명이 창궐하던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3:15) 언약을 따라 거룩한 씨를 보존하사 인간 구속의 역사를 펼쳐 나가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26)는 것은,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속주 여호와께 기도와 찬양, 그리고 감사와 간구가 있는 공식적인 예배를 연합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가인의 후예들이 성을 쌓고 악기와 무기를 개발하는 등 세속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세상 왕국의 기초를 다져 가는 동안, 셋의 후예들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연합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 왕국의 기틀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다. 영적 셋의 후예들이다. 가인의 후예들이 죽음에 이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으나 우리는 생명에 이르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주 가운데 쫓겨나가는 가인조차도 불쌍히 여겨 목숨을 살려주심같이, 우리도 저 수많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겠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겠다.
뿐만 아니라, 내 속에 끊임없이 분출하는 가인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늘 겸손한 마음, 회개 자복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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