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우리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한다.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준점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약속한 내용이고, 신약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과 또 장차 심판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구약에 나오는 많은 인물도 그 삶의 한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인물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열망하는 가운데, 부지중에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보려고 애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특별한 사람이 바로 이삭이라는 인물이다.이삭의 일생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 이삭과 예수님의 출생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이삭과 예수님은 나시기 전에 이미 예고되었고, 출생이 불가능한 가운데 태어났다.
이삭은 태어나기 25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이 처음 예고된 것은 언제일까요?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된 곳은 창세기 3장이다. 창세기 3장15절을 흔히 원시복음이라 일컫는데,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구약에서는 수없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날 것을 하나님께서 예고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는 육신의 몸으로서는 자녀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고,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에 이삭은 출생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히11:11)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처녀가 잉태했다! 이것은 당시뿐만 아니고 오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만 생명이 탄생된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하고 반응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는 잉태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출생했다. 더욱이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돌맞아 죽을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의 신앙으로 무사히 출생할 수 있었다.
이삭과 예수님의 이름은 출생 전에 지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고 말씀하셨다.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나서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에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그 아기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아들임을 알리고 그 이름을 미리 정해 주었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 이삭은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에게서 늦게 얻은 독자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희생시키고자 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번제로 바치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을 앞에 두고,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순종하고 무조건 그를 신뢰하는 것 뿐이었다.
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무를 지고 올라갔는데, 이는 자신을 번제로 태울 나무였다.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은 오직 한가지 질문만 했을 뿐이다.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다음, 자신을 결박하려 하자 아들은 비로소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잠자코 그 결박을 받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이미 이삭은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세푸스 같은 경우엔 이삭이 적어도 25세는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삭은 반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죽기까지 복종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삭은 몸소 그것을 실천한 구약의 인물이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했다. 온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홀로 진다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기 때문에, 땀이 피가 되어 흐르듯 그렇게 기도하셨고, 결국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는데, 그것은 자신을 못 박을 나무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르신 바로 그 골고다 언덕은, 2천년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올랐던 바로 그 모리아산이었다.그 고난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웠던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천하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속죄의 제단에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실 수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황급히 부르시며, 칼을 쳐든 아브라함의 손을 급히 막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예비해 놓으신 다른 번제물을 주시며, 죽음에서 이삭을 살리셨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난의 십자가 위에 매달아, 물과 피를 쏟으시고 운명하셨을 때, 하늘도 깜깜하게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흘 후, 죽음의 권세를 산산히 물리치시고, 무덤문을 열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그리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창대한 언약의 후손을 주셨듯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 땅끝에서부터 창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의 반열로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삭의 생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다투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부친 아브라함 때에 판 우물들을 메워버리자 그랄 골짜기로 옮겨갔는데, 그들이 그곳의 우물도 다 메워버렸다. 이삭은 묵묵히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 그런데, 이삭과 그 식구들이 여러 곳의 우물들을 팔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다. 그들이 시비를 걸어온 우물을 다툼이라는 뜻의 ‘에섹’이라 하였고, 또 그들이 대적해온 곳의 이름을 대적한다는 뜻이 ‘싯나’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팔 때 그에게 질린 블레셋 사람들이 물러갔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비로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이삭을 찾아와서 화해를 청하였다.“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8∼29)
예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해당하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모습을 골고루 갖춘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고 괴롭히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긍휼의 눈으로 저들을 바라보았고, 자신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자들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하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주님의 사랑과 긍휼은, 후일 박해를 당해가며 복음을 전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결국 로마제국을 무력이 아니라, 사랑의 복음으로 굴복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사랑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다툼과 욕심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 물론 이삭은 연약한 인생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발견함과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 부부는 늦둥이로 태어난 아들을 끔찍이도 귀여워했을 것이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과보호와 지나친 사랑 속에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성격은 결단력이 있고 외향적이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그 반면에 부모의 귀여움과 보호 속에 자랐던 이삭은, 비록 유목민으로 광야를 헤매며 다니는 생활이었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양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께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삭은 나중에 아들 중에도 조용하고 꾀 많은 야곱보다는, 맏이이자 사나이 같은 에서를 더 좋아했다. 결국 이삭은 에서를, 부인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하게 되었고, 형제간에 엄청난 다툼을 일으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흉년이 들자 약속의 땅을 벗어나 블레셋 땅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그 아내 리브가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하여,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삭은 평범하고 특징이 별로 없는 보통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소심하고 겁도 많고 내성적이었을 것이고, 다툼을 싫어하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삭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으셔서, 그 그릇대로, 그 성품대로 사용하시어, 언약을 이루어 가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이러한 보통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 바로 이삭은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수없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듯, 보통사람 이삭을 언약의 위대한 족장으로 세우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바로 여러분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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