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처음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유전자는 모두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그는 우리의 표상이고 근본이다. 그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사모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고 있다.
● ‘아담’이란 이름은 ‘흙’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다마’의 복수형(흙덩어리!)인데, 그는 땅의 티끌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시드는 꽃과 같은 인생이지만 다만 그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 높임을 받는 것 뿐이다.
그리스어의 anthropos(사람)는 ‘위를 쳐다보는 자’란 뜻이라고 하며, 영어의 man은 범어(梵語)의 mnu에서 온 것인데 그것은 ‘생각하는 자’란 뜻이라고 한다. 그리스어나 영어는 사람의 이성을 가리키고 있고, 히브리어는 그의 육성을 보여주고 있다. 천하면서도 귀하고, 귀하면서도 천한 것이 인생이다. 아담(흙덩어리)이란 이름 자체 속에 벌써 동정의 눈물이 감도는 그 무엇이 있다.
● 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전인류의 육적 대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우주통치와 문화적 사명 등을 위임 받았다. 그의 범죄 후에도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원 약속, 곧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이라는 최초의 은혜 언약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로서 지, 정, 의의 인간성을 보유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창2:19)에 보면 모든 동물의 이름을 명명하게 되는데, 이것은 뛰어난 창조능력, 통찰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창2:23)에 보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며 감탄에 감탄을 한다. 그에게는 감성도 풍부하였다.
한편 아내 하와의 권유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을 볼 때, 유약한 성품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아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남자임을 또한 알 수 있게 한다. 아담이 잠에서 깨었을 때 없어진 것은 갈빗대뿐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외로운 삶속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만들어주신 여자는 흙이 아니라 한 공정을 더 거친 재로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아담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과 진취적 모험심으로 가득찬 빛나는 존재였다. 여자는 남자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평균 수명이 75세인 경우, 여성만 혼자 살면 7년을 더 살게 되고, 남성만 혼자 살면 7년 수명이 단축된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창3:12)에 보면 타락 후 아담은 자신의 범죄 책임을 아내에게 미루고 있다. 책임을 전가하는 소심한 성품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어쩌면 그는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렇게 해서 이미 아담의 때로부터 “...더라면” 하는 탄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난 중의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 그 나무를 심어놓지만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것을 먹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태어남을 원망하는 욥을 꾸짖으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피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40:7-8).” 남 탓 한다고 책임이 전가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아담은 자신의 죄과,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한 (창4:1,25)에 보면 그 자녀를 ‘여호와께서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창3:10)에 보면 ‘벗었으므로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토지를 갈고 살아가게 되는데(창3:24), 이후 극심한 노동의 고통과 또 가족부양, 형제 살인의 아픔 등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천지창조 당시 전인류의 조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타락 이전의 완벽한 에덴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타락으로 야기된 현재의 세상, 즉 엉겅퀴와 가시가 있는 이 세상에서의 생활을 함께 경험하게 되었다.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추방, 그러나 하나님께서 130세에 셋을 허락하였고, 이후 고단한 인생을 살다가 930세에 죽는다. 이같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책임성과 의지력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참으로 책임적 존재이다.
●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담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으셨다. 그 분이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유’였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3:16)
하나님은 아담이 바다의 새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고 싶으셨다.(창1:28)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에게도 자유에 대한 책임의 마지노선이 필요했다.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겠다는 신뢰의 약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7) 이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실과를 먹었다. 그것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뜻이었고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며 그가 받은 복을 거부하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 선하신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죄’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을 자동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좇아 순종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 인격체로 창조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깊은 교제의 관계를 나누시기를 원하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금 이순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의 교제로 초청하신다.
● 아담은 왕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주권이 인정을 받았고, 사자들도 감히 그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고 공중의 새들도 그에게 복종하였다. 또 물고기들에게 명하기만 하면 그가 물 위로 솟아오르는 재주도 부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종의 종이 되어있다. 온 얼굴을 땀으로 씻으며 날마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신경이 피로해지는 일과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왕의 위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회복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눈으로 직접 우리의 위엄을 목격할 때가 올 것이다. 표범이 어린 양과 함께 누우며, 사자가 황소같이 풀을 먹으며, 옛날에 사람이 피조물들의 왕이었던 것과 같이 이 땅 위의 임금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는 때이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은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 분은 광야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였다. 한 사람은 사단을 신뢰하였고, 또 한 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한 사람은 완전히 패배하였고, 또 한 분은 완전히 승리하였다. 마지막 아담은 승리의 능력과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들로 하여금 마지막 아담을 의지하도록 하신 은혜의 하나님께 영원토록 찬양을 돌리자!
● 아담은 범죄 후 그 자신과 아내의 벌거벗은 수치를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옷으로 가리려 했다. 그러나 이 인위적인 행동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를 얻으려는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의 수치를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 동물을 잡으시고,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그의 부끄러움을 감추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죽인 결과 피 흘리게 하심으로써 만드신 것으로서 장차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실 것을 암시한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야기한 모든 부정적 요소, 즉 죄, 사망, 저주, 수고, 고통 등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가려주심으로써, 대신 새로운 은총을 주셨다. 소망과 생명과 사랑의 역사를 허락하셨다.
아담 안에서 일찍이 우리가 아들의 권리를 상실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양자가 되었다. 아담으로 인해서 우리는 견고히 설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를 진흙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고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주셨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모든 점에서 의로 여김을 받는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내시고 그 이상의 것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새롭게 열릴 신천신지, 천국의 에덴을 소망하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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