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시대 베들레헴에 살던 유다지파 소속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그 땅에 임한 흉년을 피하여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그곳에서 모압 여인과 결혼했는데, 오르바와 룻이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 이주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죽었고, 그의 두 아들마저 십년도 채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따라서 모압 땅에는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먼저, 엘리멜렉이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에 대한 평가이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생활면에서도 극도로 힘든 때였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하며 제 소견에 옳은대로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끊임없이 주변 이방인의 침입을 받았고, 흉년이 들거나 역병이 번지는 등 살림살이도 궁핍했다.
따라서 엘리멜렉이 모압 땅으로 이주하고자 했을 때 이스라엘에 임했던 흉년은 아마도 하나님을 떠난 댓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징벌은 개인적으로 피해 도망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흉년을 피해 이방인의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징벌을 이방 땅으로 도피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에서보다 모압 땅으로 이주하여 더 큰 환난을 겪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이다. 그 부모는 깊은 종교적 신앙고백으로 아들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고 엘리멜렉 역시 부모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이름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받들어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멜렉이 눈앞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그의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이방인 아내를 맞이한 것에 대한 평가이다. 결과적으로 룻이라는 현숙한 효부로 인해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시 낙을 누리기는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 아내를 맞이한 것은 명백히 율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모압과 암몬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압과 암몬 족속의 우상은 다른 어떤 우상보다도 가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모압 여인과의 결혼은 당연히 율법정신에 어긋난 것이었고, 또한 모압 땅은 저들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불과 3,4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임을 감안할 때, 신앙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 신실한 종을 수백 km 떨어진 고향 땅으로 파송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신학자는 엘리멜렉의 두 아들이 요절한 까닭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여튼 이렇게 하여, 엘리멜렉의 가족은 모압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만에 남편과 두 아들은 객사하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과부가 되었으며, 재산마저 다 탕진한 비참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 흉년을 피해 모압 땅까지 왔지만 도리어 더 큰 환난과 시련을 경험한 나오미는, 고난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귀향하려고 한다. 이제 나오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뿐이었다. 사실 유다 땅으로 귀향한다고 해도, 나오미에게는 별다른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오미는 아직 젊은 두 며느리에게 자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평안히 살도록 권고한다. 이리하여 오르바는 결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갈 것을 다짐한다.
그러면, 왜 룻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앞으로 평생 자신이 생계를 책임지며 시어머니를 봉양해야하는 고난의 길을 고집스럽게 따라 나섰던 것일까? 자신의 고향과 친족을 떠나, 책임과 고통만이 무겁게 짓누르는 희생의 길을 걸어간 룻이란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총회에 결코 들어올 수 없었던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까? 이 시간 우리는 룻의 삶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 먼저, 룻은 착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자 나오미는 타향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늙고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고향 땅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당시 과부들은 보통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래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얘들아, 나는 이제 고향 유다 지방으로 돌아가련다. 너희들은 아직 젊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려무나.”
그러자 두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정이 깊었던 것 같다. 시어머니의 설득에 결국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 제게 어머니를 버려 두고 혼자 가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가겠습니다. 어머니의 나라가 저의 나라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 곁에 저도 눈을 감고 묻히렵니다. 죽음이 오지 않고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시어머니의 불행을 젊은 며느리 룻은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 젊은 과부 룻은 당연히 친정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늙고 외로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하려 했던 그녀의 갸륵한 마음은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다. ‘룻’이란 이름은 ‘여자 친구’, ‘우정’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이방여인이기는 했지만 룻은 그 이름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시어머니의 고향에 돌아온 후 룻은, 당장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추수하는 남의 밭에 나가 보리이삭을 주워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타향 땅. 아직 젊은 여인인데, 얼마나 자존심도 상하고, 두렵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겠는가! 하지만 룻은 개의치 않았다. 세속적인 판단으로 볼 때 룻의 행동은 바보스럽고 무모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룻의 이같이 착하고 따뜻한 마음씨, 지극한 효심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삶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었다.
룻은 그 밭의 주인 보아스의 눈에 띄게 되었다. 보아스는 자기 밭 여기저기에다 이삭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젊은 과부 룻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룻은 매일 같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다 시어머니를 섬겼다. 룻이 사려깊은 인물인 보아스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착하고 따뜻한 마음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보아스 역시 이방 모압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했고, 룻은 비록 이방 모압의 여인이었으나, 유다족속의 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 다음으로, 룻은 결단력있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근실한 여인이었다.
룻은 단순히 착하기만 한 여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무기력해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고생을 각오하고 유다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룻이 자기가 태어난 민족, 일가친척, 익숙한 환경을 떠난 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본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과 같은 엄청난 결단이었다. 룻은 자기 민족과 분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심할 만큼 지조가 있고, 결단력이 있는 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룻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땅에 거하게 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방인으로서 받게 될 냉대나 육체적인 어려움 등도 감수한 채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 줍기를 자처하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현숙한 여인’이요,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근실한 여인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어찌 평탄하고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겠는가? 어떤 분이 조사한 것에 따르면, 우리가 웃고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평균 5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일생을 살아봐야 웃고 지내는 시간은, 70평생 불과 100일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힘겨운 것이다. 고달픈 인생살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낙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믿음을 잃지 않고 적극적이고 근실하게 고난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물을 씯고 달려나가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룻은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다.
룻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존재를 깨닫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던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모압 여인 룻은,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르느냐 아니면 고향에 남아 있느냐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신앙 고백과 함께, 자신의 민족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게 된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이 아주 돈독하고 신실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나오미는 고난의 순간에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였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통해 이방여인 룻에게 여호와신앙을 불어넣어 주셨고, 룻을 만나 주셨다. 그리고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심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룻으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신앙의 결단이 룻의 일생을 좌우하게 되었다.
우리 인생은 늘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을 선택하느냐 저것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물론 신앙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셔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기회를 던져 주신다. 막연히, 우연히 내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를 마련해서,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결단하게 하신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택함받은 백성인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어쩌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일꾼인 우리가 해야할 사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중보기도하자.
● 룻은 지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아름다운 성품으로 효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섬겼고, 결국은 자기의 동족과 문화와 신앙과 세상의 안일함 등을 모두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따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아스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다윗 왕가의 혈통을 이루어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과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복되고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기까지, 순전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희생과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즉 신앙의 연단을 감수하는 자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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