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세상읽기/칼럼

[김용삼 칼럼]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 테러범들의 비참한 최후

성북동 비둘기 2024. 7. 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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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 진모는 교수형, 신기철 상좌는 도주하다 사살, 강민철은 25년 감옥생활하다 병사

 

-이들에게 지급된 수류탄은 안전핀 뽑는 즉시 터지는 자폭용, 그들은 적을 죽이고 도주 위해 수류탄 안전핀 뽑았으나 그 즉시 폭발하여 큰 부상 입고 체포돼

 

이런 저런 회고록을 읽다 보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흥미진진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럴 때 큰 희열을 느낀다. 최근에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한 외교관이 쓴 책을 읽다가 외교사의 비화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버마암살 폭발사건의 외교적 성찰이고, 저자는 주 노르웨이 대사 겸 아이슬란드 대사, LA 총영사를 역임한 외교관 최병호다.

 

최병호 대사는 1983 10 8, 외무부 서남아과 서기관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순방을 위한 특별기에 탑승하여 버마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0 9,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나 그 사후처리를 담당했고, 사건 종료 후 이상옥 외무부 차관보의 지사로 아웅산 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던 외교관이다.

 

그의 저서에 담겨 있는 내용 중 외교 비사(祕史)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최병호 대사의 책 표지.

 

 

#. 부자(父子) 모두 버마에서 사망한 이범석 장관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여 랑군에 갔다가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순직한 분 중의 한 명이 이범석 외무장관이다. 그의 부친 이재순 씨는 일본 통치 시절 평양에서 고무신 등을 제조하는 사업가였다. 1943년 부친이 사업 차 버마 체류 중 사망한 관계로 이범석 장관은 버마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1983 9 1일 뉴욕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 KE007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사할린 섬 인근 해역에서 피격되어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한 외교적 대응을 위해 이 장관은 9월 하순 뉴욕에서 미 국무장관을 면담하고, 유엔총회에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활동을 한 후 10 2일 귀국했다.

이범석 장관의 부친 이재순 씨는 일본 통치시절 평양에서 사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1943년 사업차 버마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83년 아들 이범석 장관도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버마에 갔다가 그곳에서 순국함으로써 부자가 버마에서 사망하는 진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 풍치가 도져서 잇몸 수술을 했는데, 하필이면 대통령 전용기가 버마로 출발하는 10 8일 실밥을 뽑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수술 후 통증이 심해 도저히 전 대통령의 버마 순방에 동행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에 실밥을 뽑고 통증을 완화한 후 대통령보다 하루 늦은 10 9일 출발하여 랑군에서 합류하도록 양해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까짓 치통 때문에 주무부서 장관이 국가행사에 하루 늦게 합류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거절당했다. 예정대로 특별기에 탑승한 이 장관은 다음날인 10 9일 아웅산 묘소에서 변을 당했다. 부자가 모두 버마에서 목숨을 잃는 비운을 겪은 셈인데,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 일본과 손잡고, 일본군에게 훈련 받은 아웅산은 친일파?

 

영국은 1937년 인도에서 버마를 분리하여 영국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버마를 침공, 영국을 몰아내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버마를 지배했다. 이 시기에 버마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가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은 1933년 랑군대학 법학부에 입학 후 랑군대학생연맹 간부, 버마전국학생위원장으로 영국과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는 인도 공산당과 접촉하여 마르크스 사상을 전파했고, 영국 당국의 검거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했다. 이때 아웅산의 탈출을 도운 것은 랑군 주재 일본 영사관이었다. 당시 일본 대본영은 산하에 나가노(長野)정보학교 출신의 첩보장교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 대좌를 책임자로 한 미나미기칸(南機關)이라는 특무기관을 조직했다.

 

스즈키 대좌는 1940 6월 일본-버마협회 서기 겸 요미우리신문 특파원 미나미 마스요라는 가명으로 랑군에 침투, 아웅산 등 버마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했다. 그의 임무는 버마 북동부의 라쇼와 중국 윈난성(雲南省)을 연결하는 유일한 자동차 도로인 버마 로드를 조사하고 보급라인을 차단하여 아시아에서 연합군 활동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나가노정보학교를 졸업한 스즈키 케이지 대좌는 버마에 침투하여 아웅산을 비롯한 버마 청년 30여 명과 의기투합하여 이들을 훈련시켰다.

 

대본영은 스즈키 대좌에게 일본군 휘하에 버마군 창설을 허가했다. 스즈키는 아웅산과 네윈 등 30명의 버마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했다. 스즈키 대좌의 도움으로 아웅산 등 30명은 1940년 중반, 중국인 선원으로 변장하여 노르웨이 선박 편으로 랑군을 탈출, 일본군이 점령 중인 중국 아모이항에 도착했다.

 

일본 군부와 아웅산 일행은 일본이 버마를 침공하면 함께 대영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버마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버마 독립을 결의했다. 이를 위해 일본과 제휴를 선언한 아웅산과 30명의 동지들은 1941년 일본이 베트남 동부 하이난 섬에 설치한 특별훈련소에서 6개월 간 게릴라 전술, 병력 지휘 훈련을 받았다.

 

그해 10월 대만으로 거점을 옮겨 훈련을 받은 아웅산과 30인의 동지들은 1941 12 26일 방콕에서 버마독립군을 창설, 일본군과 버마에서 공동으로 대영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때 아웅산은 오모다 몬지(面田紋次)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다. 30인의 동지들은 피를 뽑아 은그릇에 섞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버마 독립을 위해 투쟁한다는 서약과 함께 이를 나눠 마셨다. 스즈키 대좌는 30인의 동지들과 함께 피를 나눠 마셨고, 버마 독립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아웅산은 일본군과 손잡고 일본군의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일본 천황으로부터 욱일훈장까지 받았다. 한국 같았으면 그는 독립 후 친일파로 멸문지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웅산은 일본에 초대되어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욱일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 8 1일 일본은 독립된 버마국을 선언하고, 바모를 총리로 하는 정부를 수립했으며, 아웅산은 전쟁장관에 임명되었다. 만약 아웅산이 한국인이었다면, 그는 해방 후 영락없는 친일파 수괴로 낙인찍혀 멸문지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웅산은 일본이 과연 버마 독립을 허용할 것인지, 또 영국 등 연합군에 승리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일본이 수립한 바모 정부는 일본군 휘하의 괴뢰 정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44 3, 일본군은 버마에서 인도를 침공하기 위해 임팔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서 일본은 보급부족으로 5만여 병력을 잃고 대패하자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1944 8월 비밀리에 연합군과 접촉했다.

 

그 결과 자기 휘하의 버마독립군 1만 명을 연합군의 랑군 탈환작전에 지원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45 5월 연합군이 랑군을 점령했고, 일본군은 8월에 항복했다.

 

#. 전두환 대통령 버마 방문 정보 줄줄이 유출시킨 버마 당국

 

버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하지만 대한민국보다는 북한과 훨씬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이 결정되자 북한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83 3월 이종옥 총리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버마를 방문했다. 8월에는 양형섭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버마를 방문했고, 아웅산 묘소에 헌화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서독에 거주한 언론인 싱 후쿠오는 그의 저서 아웅산 피의 일요일에서 양형섭 등 대표단이 8 7일 버마를 방문하여 귀빈접대를 받으면서 전 대통령의 방문 시 일정과 장소를 점검했다고 한다. 이것은 버마 당국에서 전 대통령의 버마 방문 관련 정보가 줄줄이 새 나갔음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다.

 

#. 동건애국호는 조총련이 기증한 간첩선

 

동건애국호는 아웅산 테러범을 버마에 상륙시킨 북한 화물선이다. 겉으로는 화물선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만경봉호, 수근호와 함께 북한의 3대 공작선 중의 하나다. 이 배는 원래 1976 4월 일본의 한 회사가 시고쿠의 고치(高知)에 위치한 이마이(今井)조선에 50억 엔이 발주한 화물선이었다. 배의 크기는 5,279, 5,300마력의 디젤 기관을 장착하여 15.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건조되었다.

 

그런데 발주사가 도산함으로써 배가 공중에 떠 버렸다. 이때 일본에서 조선화보란 언론사를 운영하던 조총련계 사업가 문동건이 이 배를 13억 엔이란 헐값에 인수하여 북한에 기증했다. 북한은 문동건의 애국심을 기념하여 배 이름을 동건애국호로 명명했다.

동건애국호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사업가 문동건이 구매하여 북한에 기증한 화물선이다. 북한 당국은 이 배를 간첩 공작선으로 개조하여 아웅산 테러 사건 때 현장에 투입했다.

 

김일성은 1977년 문동건을 평양에 초청,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상공인의 귀감이라고 치하하고 그에게 북한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문동건 부부를 김일성 관저로 불러 만찬을 베푸는 등 파격적으로 예우했다. 북한은 동건애국호를 소총·기관총·수류탄 등으로 무장했고, 평양의 노동당 연락부와 직접 교신할 수 있는 고성능 무전시설을 장비했다. 이후 이 배는 간첩수송, 공작장비 및 전략물자, 밀수품을 싣고 일본·홍콩·마카오·싱가포르 등 동남아와 소말리아 등지에 취항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2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조선대흥선박 소속의 간첩선 동건애국호는 아웅산 폭파사건의 주범 3명을 싣고 1983 9 17일부터 24일까지 버마 랑군항에 기항했다. 배에는 선장 김용문 등 39명의 선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 공작선의 랑군항 입항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배의 랑군항 기항 사실을 처음 보고한 사람은 주 스리랑카 대사였고, 보고 시점은 10 5, 그러니까 전 대통령이 버마로 출발하기 사흘 전이었다.

 

#. 전두환 대통령, 북한 간첩선 랑군항 기항 사실 알아

 

9 17일 랑군에 입항한 동건애국호는 9 21일 오전 9 30분까지 출항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선장이 다음 목적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가기 위해서는 배의 수선이 필요하다면서 출항 연기를 요청했다. 버마 당국은 일단 부두를 떠나 외항으로 나가서 수리 후 9 24 12 30분에 출항하도록 허가했다.

 

수리를 핑계 삼아 9 24일까지 부두 바깥 외항에서 대기하던 동건애국호는 9 21일과 22, 이틀에 걸쳐 테러범들을 소형 동력선으로 랑군 시내에 상륙시킨 후 9 24일 랑순항을 떠났다.

 

사건 후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랑군 항만경찰관은 9 21일에 북한 선원 2, 9 22일에 한 명 등 세 명의 북한 선원이 하선 후 9 24일까지 배로 귀환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는 화물검사이며, 선원들의 출입국 관계는 소관 사항이 아니어서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 기념우표.

 

박창석 기자의 아웅산 리포트에 의하면 아웅산에서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기백 합참의장은 버마로 출발 직전, 청와대에서 전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때 대통령은 안기부로부터 북한 대형 공작선의 랑군 정박과 관련하여 버마 방문을 취소하자는 건의를 받았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이미 양국 간에 방문을 하기로 발표된 상황인데 어쩌겠는가하면서 걱정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도 출발 직전에야 동건애국호의 버마 기항 사실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 서남아 순방계획을 취소했다면, 아니 요주의 지역이었던 아웅산 묘소 참배라도 취소했다면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 2, 3의 암살계획은 없었나?

 

전두환 대통령은 버마 방문 후 인도와 스리랑카 방문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10월 초 전 대통령의 인도 방문에 앞서 급보가 전해졌다. 북한은 인도 주재 공관원 및 기타 요원을 30여 명으로 두 배나 증강시켰으며, 그중에는 외교관 신분이 아닌 인물도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0월 초 전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인도에 파견되었다가 급거 귀국한 외교관(정보기관원으로 추정)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랑군항에서 폭파 공작원 세 명을 침투시킨 동건애국호는 9 24일 랑군 항만청에 오늘 랑군 외항을 출항,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간다고 허위 신고한 후 출항했다. 그런데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9 29, 전두환 대통령의 세 번째 기착지로 예정되어 있던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입항했다.

 

동건애국호는 9 30일부터 이틀 간 선원 26명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콜롬보 시내와 동물원 등을 관광하면서 한국대사관과 대사관저, 스리랑카 대통령 공관 등을 촬영했다. 뿐만 아니라 10 4일에는 수도 콜롬보에서 자동차로 3시간 떨어진 캔디까지 버스 편으로 단체 관광을 나갔다.

 

전 대통령 일행은 10 14일 오후 1 50분 콜롬보에 도착, 다음날(10 15) 오전 캔디의 식물원과 부처님 이빨을 안치한 불치사(佛齒寺)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만약 아웅산 묘소 폭파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했다면 스리랑카의 캔디 식물원과 불치사 어디선가 제2, 3의 암살 시도를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스리랑카 당국은 동건애국호가 콜롬보에 기항하자 감시를 강화했다. 이 와중에 10 4일까지로 되어 있던 기항 허가를 열흘 간 연장 요청하자 이를 수상하게 여겨 불허했다. 한국대사관의 요청에 따라 스리랑카 항만 당국은 10 6, 동건애국호에게 지체 없이 출항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콜롬보 항 바깥 13마일 부근에서 대기했다가 이란을 향해 떠났다.

 

#. 폭파범들의 비참한 최후

 

랑군에 침투한 폭파범은 조장 진모, 대원 강민철·신기철 등 3명이었다. 이들은 10 9 10 28, 리모컨을 눌러 원격조정 폭탄을 폭발시켜 한국 정부의 장관을 포함, 공직자 17명이 사망하고 15명 부상, 버마 공무원 4명이 사망하고 32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후 현장을 탈출했다.

 

이들이 통보받은 계획에 의하면 암살 실행 후 현장에서 4 정도 떨어진 파준다웅강에서 쾌속정이 공작원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4쯤 물길을 달려 랑군강과 만나는 하구의 타쿠핀 마을까지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타쿠핀 마을 강가에서 은신하고 있으면 안내원이 접선하여 10 12, 랑군강 하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건애국호로 귀환시킨다는 것이었다.

 

사전 통보받은대로 조장 진모는 사건 직후 도보로 랑군강 쪽으로 도망쳐 파준다옹강 근처 풀밭에 숨었다. 다음날인 10 10일 밤 9 30분경 어둠을 이용하여 강을 따라 헤엄쳐 내려가던 중 주민 신고로 발각됐다. 경찰에게 포위되자 진모는 수류탄 핀을 뽑아 던지려 했으나 수류탄이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그 결과 오른손 팔목 이하가 날아갔고, 왼쪽 손가락 네 개개 잘려나갔으며 얼굴과 가슴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버마 법정에서 재판 받는 폭파 주범 진모(왼쪽 두번째)와 강민철(오른쪽 두번째). 진모는 재판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고, 1985년 교수형 당했다.

 

사건 현장에서 다른 길로 도망친 신기철·강민철은 11일 새벽 랑군강 하구 강 언덕에 위치한 타쿠핀 마을에서 마을 주민에게 발각됐다. 경찰이 출동하여 이들을 경찰서로 데려가 짐 검사를 하던 중 신기철이 수류탄을 터뜨려 경찰 세 명이 크게 다쳤다. 경찰이 총을 쏘아 신기철을 사살했고, 강민철은 도주했다.

 

12일 아침 사건 현장에서 8 떨어진 퀜 와잉 마을의 갈대숲에 숨어 있던 강민철은 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그는 수류탄을 터뜨려 경찰 세 명을 죽이고 자신도 부상을 당해 체포됐다.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휴대 권총은 벨기에제 브로닝이었다. 확인 결과 1980 11 3일 전남 횡간도에 침투한 북한 간첩이 휴대했던 것과 동일했고, 일련번호가 횡간도 간첩이 소지했던 권총보다 2번 앞선 것이었다. 인터폴은 이 권총이 북한이 1975 1 8일 서독 거주 스웨덴 상인을 통해 벨기에에서 수입한 100정 중의 하나임을 확인했다. 버마 정부는 이 권총을 북한 소행의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다.

 

북한 공작원들은 작전 도중 발각되면 체포를 막기 위해 자폭을 훈련받는다. 김정일은 공작원들에게 위험에 처하여 어쩔 수 없게 된 때는 자결하라. 전투원 교양에서 기본은 자폭 요양을 잘 하는 것이다. 자폭해야 공산주의자이고 체포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주체의 인생관으로 무장하여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는 육체적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칠 줄 알아야 한다라고 교시했다.

 

범인 체포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세 명 다 포위된 상황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수류탄으로 자폭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장 진모와 강민철은 자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수류탄을 빼들었다.

 

원래 수류탄은 투척하는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여 안전핀을 뽑고 5초 정도 지난 후 폭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포위망이 좁혀지자 경찰을 공격한 후 현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다. 이들이 소지했던 수류탄은 일반 수류탄과 달리 안전핀을 뽑는 즉시 폭발하도록 자폭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수류탄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은 공작원도 생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폭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북한은 이런 사례를 막기 위해 안전핀을 뽑는 즉시 폭발되는 특수 제작된 수류탄을 이들에게 지급했다.

아웅산 폭파범 강민철. 그는 자신들에게 지급된 수류탄이 안전핀을 뽑으면 그대로 폭발하여 원했든 원치않든 자폭할 수밖에 없는 특수 제작된 제품이란 사실을 알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사건 전모를 털어놓았다.

 

부상 치료 과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강민철은 자신의 치료를 담당하던 군의관을 통해 사건 전모를 자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결과 11 3일 강민철은 버마 사건조사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백했다.

 

나는 북한군 육군 상위(한국의 대위급)이며 군번은 9970, 나이는 28, 소속은 개성 소재 정찰중대다. 우리 세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아웅산 묘소 방문 시 동 묘소를 폭파하여 전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강창수 소장(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장)으로부터 받았다(강창수는 북한군 총사령관을 지낸 강건의 아들이다).

 

조장은 진모 소령, 조원은 나와 신기철 상위다. 우리 세 명은 선박 편으로 1983 9 9일 황해도 옹진항을 출발하여 9 22일 랑군항에 도착했다. 랑군항 도착 시 북한 공관원 두 명이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여(전창휘 참사관의 집) 그곳에서 2주일간 은신했으며, 그곳에 이미 폭파장비가 준비되어 있었다.

 

1983 10 7일 새벽 2시에 진모와 내가 망을 보는 가운데 신기철이 아웅산 묘소 지붕에 올라가 원격조종 폭탄 두 개를 묘소 천장에 설치했다. 우리 세 명은 1983 10 9일 오전 묘소 부근 영화관 앞에서 기다리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모터케이드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장 진모가 폭발 스위치를 눌렀다. 폭발 후 진모 혼자 도주했고, 나와 신기철은 소형 배를 빌려 랑군강을 건너 달아났다가 버마 경찰에 체포됐다.’

 

그런데 이들을 태우고 탈출시킬 쾌속정도, 동건애국호도 나타나지 않았다. 10 8일 스리랑카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간다던 동건애국호는 사건 직후 이란에 있다가 예멘의 아덴으로 향했다. 랑군으로 돌아와 이들을 귀환시키는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공작원들은 쾌속정을 탈 수 있는 약속 장소로 이동했으나 배는 나타나지 않았고, 각자도생 중 10 10~12일 사이에 사살·체포되었다. 그들은 북한의 소모품에 불과했으므로 거사 후 사살되든지 자폭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민철은 수감생활 15년이 지난 후인 1998 11, 감옥에서 버마 주재 한국 외교관과 면담했다. 정부 인사들은 그 후 10여 차례 면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강민철은 가명이고, 자신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강영철이라고 밝혔다. 고향에는 모친 김옥선과 미혼의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조장 진모의 실명은 김진수, 범행 후 도주하다 사살된 신기철의 본명은 김치오라고 진술했다. 강민철은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미얀마 및 한국 정부에서 허용한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이를 묵살해버렸다.

 

강민철과는 달리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던 진모는 버마 사정당국에 의해 1985 4 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강민철은 25년간의 긴 수감 생활 끝에 버마 교도소에서 지병인 간질환으로 2008 5 18일 사망했다.

 

#. 버마 사회 꽉 잡고 있었던 일본의 도움을 받다

 

일본은 1940년대 초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일 때부터 아웅산, 네윈 등 독립운동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버마 독립 후에도 버마 지도층과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중국을 제외한 다른 어느 나라보다 버마 지도층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였다.

 

일본은 버마의 최대 원조 제공국이었고, 일본대사관은 버미 고위층과 요로에 정보 소스를 가지고 있었다. 아웅산에서 북한이 테러를 벌이자 일본은 아베 신타로 외상이 버마 외상을 접촉했고, 일본 외무성의 아리마 아주국 참사관을 버마에 파견하는 등 극비에 속하는 최고급 정보를 수집하여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덕분에 한국은 사건 처리에 큰 도움을 받았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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