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 강해(3)/ 그리스도의 종(갈1:6-10)

성북동 비둘기 2024. 7. 2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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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늘의 말씀은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단계입니다.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는지 저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읂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 여기서 "속히 떠난다"는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탈영, 반역, 배반의 뜻이 있다. 군대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가차없는 사형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책망하고 있다.

 

2.바울은 <은혜>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속히 떠나는 것에 대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 본문은 아주 심각하게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은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 복음의 예수님 비유도 탕자의 비유만 빼고서는 전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어떻게 부르셨는가? <은혜>로 부르셨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은혜일 따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 사실부터가 은혜이다. 내가 의로워서 그렇게 해 주셨는가? 나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가 털끝만큼도 없다. 우리는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3.그 다음으로는 이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2 천년 동안 이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에게까지 와서 전해졌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러니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것만으로 엄청난 축복이 아니겠는가!

 

(예화) 일본의 요꼬라는 사람은 전쟁이 끝난줄도 모르고 27년간 괌의 솦속에서 살았다. 기가막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주어야 한다.

 

4.그런데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엄청난 은혜이다. 마음문이 열리는 것도 은혜이다. 이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성령이 감동해서 그 마음문을 열어주셔야 겸손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은혜에는 우리의 공로가 필요없다. 온전히 <은혜>일 따름이다. 이는 전적 타락(total corruption)이 구원의 기초가 된다.

 

5.그런데 이렇게 귀한 <은혜의 복음>을 감격스럽게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는 이단에 속은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그 이단은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만으로 부족하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공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단의 특색이다. 믿음만 가지고 되나 가끔 좋은 일도 해야지- 아니다. 선행도 믿음의 열매일 따름이다. 선한 일 하는 것도 은혜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런 물질을 주셨다. 오로지 은혜일 뿐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공로는 전혀 없다. 이단은 왜 은혜를 거스리는 이런 것들을 주장하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실추시키기 위함이다. 무효로 돌려버리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살살 꾀어서 유대주의로 율법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6.(예화). 오래전 영국에서 한 전도사가 부흥회를 열심히 잘 마치고 천막을 거두고 있었다. 젊은이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 "저도 구원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늦었습니다" "?" 전도자가 대답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행해야 할 선한 일은 따로 없습니다" 말하더란다. 그렇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해야할 선한 일은 없다. 내가 할일은 그저 사랑을 받아들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필요할 뿐이다. 이는 마태복음22장 혼인잔치의 비유의 주제가 된다. 초청자가 예복을 보내주었으니 그것을 입고 잔치에 참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토록 힘이 든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사랑을 받아들이기기 그렇게 힘이 들다.

 

7.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복음>(6)을 따른다. 다른 복음은 없다. 복음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희를 요한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7)했다. '요란케 하여'란 말은 <타라손테스>인데 이느 아주 혼키케 한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이는 <인본주의>때문이다. 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아서 이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교만한 사람이 이런 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예화)선교사가 짐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를 태워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계속 차를 타고서도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선교사가 물었다. 그랬더니 "선교사 양만 나 한몸 차를 탄것도 미안한데 보따리까지 차를 타서야 쓰겠습니까?" 하더란다.

 

8.바울은 모든 면에 폭넓은 타협과 관용을 말하고 있지만, 구원에 있어서만은 <절대고집>을 고수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구원은 절대 은혜이다. 내 공로는 없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뿐이다. 우리는 기왕에 예수를 믿을바엔 화끈하게 믿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이와같이 100% 은혜임을 믿는 절대신앙의 그리스도인,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은혜의 복을 주신 주님께 감격적으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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