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 강해 (12)/ 율법에 속한 자(3장10-14절)

성북동 비둘기 2024. 7. 2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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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2 율법에 속한 자(310-14)

 

1.율법에 속한자는 저주 아래 있다.

오늘 본문은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1)율법에 속해있다는 말은 율법에 꼭 매여 있다는 말이다. 행위도 의식도 생각도 매여 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다. 율법에 매여 언제나 벌벌 떨면서 살아간다. 예수를 믿어도 참 힘들게 믿는다. 기쁨이 없다. 은혜도 없다.

(2)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첫째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정결하게 산다고 할 수 있는데도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둘째는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 자기와 비교해서 저 사람 저래서 되겠나’ ‘참 한심하다고 비판한다.

(3)율법에 속한 사람의 특싱은 열심은 있지만 기쁨이 없다. 극성은 부리지만 감격이 없다. 항상 영혼이 비쩍 말라 있다.

(4)본문대로 하면 율법은 다 지켜야 한다. 끝도 없다. 한 가지를 지키면 그 다음에는 두가로 한도 끝도 없다. 지켜야할 것이 늘어만 간다. 그래서 결국엔 내가 내 율법이 된다.

 

2. 율법주의- 외식주의- 공로주의

오늘 본문 1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1)율법을 다 지킨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실제로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외식에 빠진다. 내용으로는 못지켜도 형식으로나마 지킨 것을 내놓으려 한다. 그러나 내용의 중심에서 보면 지킨 것이 결코 아니다.

(2)결론적으로 율법주의에 빠지면 점점 외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3)그다음 빠지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공로주의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선한 일ㅇ르 5가지 하고 악한 일을 5가지 했으므로 반반이다. 선한 일을 7가지 하고 악한 일을 3가지 했으니 그 3가지는 봐주실 것이다. 이런 공로주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9가지 선한 일을 해도 1가지 죄를 지었으면 죄인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면 나중에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3.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한다. 이는 바박국 24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43절에도 인용한 바 있는 창세기 156절에 있는 말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말씀하고 있다. 바울의 신학은 이 두 말씀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것이라는 말씀이다.

(2)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는 어떠한가? 12절에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이 율법이라고 말할 때는 어디까지나 율법적인 이야기, 율법주의자들의 이야기요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오직 은혜를 중심으로 하는 말이다.

 

4.포도원의 비유이야기

포도원의 비유는 마태복음201절에서 16절에 나온다. 어느날 주인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일하게 하고 삯은 주는 이야기 이다. 그런데 아침이나 점심이나 오후 파장 할 때 온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한 삯을 주고 있다. 그래서 먼저 온 사람이 원망하고 있다.

(1)그러나 이 일을 하게 하는 자체가 은혜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하루종일 빈둥거리면서 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율법주의 질서는 좀더 일했으므로 더 받는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한다. 율법주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3)은혜의 질서는 더 일해도 은혜요 덜 일해도 은혜이다. 불평할 것이 없다. 내게 주어진 품삯이 그대로 은혜이기 때문이다.

 

5.예수님의 십자가는 은혜이야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13)

(1)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율법 아래서 행해진 저주 사건으로 보고 있다.

(2)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죄인아닌 사람(예수)이 저주를 받았다. 이는 또한 의인이 저주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3)의인이 죄인처럼 죽었으면 죄인이 의인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6.속량의 의미

(1)속량이라는 말은 무엇으로부터 사 낸다는 의미이다. 구출하기 위해 값을 치루고 사냈다는 것이다. 공짜는 믿기 어렵기에 확실하게 값을 치렀다.

(2)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랑흔 대신 치루었다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3)내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다 못해도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 벌도 있고 저주도 있지만 용서했다는 말을 믿고 <감사>로 받아 들여야 한다.

 

7.탕자의 비유(15)

(1)탕자이런 차원에서 탕자는 훌륭한 사람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탕자는 은혜에 속한 사람이요 탕자의 형은 율법주의자이다. 형은 타락하고 돌아온 동생에 아버지가 은혜를 베푸는 것에 불평 불만이 많았.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2)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버지의 기쁜 마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은혜주의자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다. 체면없는 사람이 아니요 의인이다. 원래 은혜주의자들은 좀 뻔뻔 스럽데 보인다.

 

8.운명을 걸고 그 은혜안에서 축복을 누리라

(1)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2)이 말씀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은혜가 미치고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약속하시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용서받은 것을 증거하고 있다.

(3)그러므로 믿음에 속했다고 할 때는 오직 긍휼, 오직 은혜, 오직 사랑, 오직 축복뿐이다. 우리는 운명을 걸고 은혜 안에서 축복을 누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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