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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기도는… /빌4:6/마6:5-8/ 김병삼 목사

성북동 비둘기 2023. 5. 2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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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기도는/4:6/6:5-8/ 김병삼 목사

 

진실한 기도는 -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진실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신뢰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습니다. 진실한 관계란 상호 간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을 열만큼 그렇게 신뢰할 만한 분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은 열렸고 계속해서 무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공허한 기도입니다.

 

기도에 관한 한 아주 유명한 사람인 조지 뮐러는 이야기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로 100% 신뢰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5만 번 이상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일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야기하기를,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100% 신뢰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는데,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기도에 대하여 생각한 후,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급급합니다.

 

사실 통성기도는 우리 자신의 답답함 때문이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지 시작하면, 우리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여러분이 이런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료화면)

수많은 청소년이 스타를 연호하는 장면 말입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 말입니다.

 

20세기 말의 현저한 현상 중의 하나는 대중 스타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삶의 목표를 상실해 가는 많은 청소년에게 idol이 필요하게 되었고 대중 스타들이 그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대상이 실제로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우상일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신뢰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외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겠지요, 그 유명한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만일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렇게 소리를 높일 이유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스타들을 향하여 불가능하지만, 내 목소리를 알아봐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신뢰를 상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중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은 반복적인 기도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시간혹은 의 많고 적음이 하나님과의 신뢰를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여기에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능이 낮으신 분도, 귀가 먹으신 분도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전해 본 사람들은 경험해 보는 것인데, 운전자에게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옆에 앉은 사람이 잔소리하는 것입니다.

 

때로 모르는 사항들을 가르쳐 줘서 도움을 받을 때도 있지만, 대게 옆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입니다. 특히 이러한 간섭은 운전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할 때 더욱 심해지는 현상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간섭은 옆에 앉은 사람의 정신적인 안정감과 필요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운전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반복적인 기도를 하고 있다거나, 하나님을 짜증 나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러한 기도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치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슬롯머신처럼 생각합니다. 이들은 슬롯머신에 동전을 집어넣고 핸들을 당기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가 쏟아질 때까지 동전을 계속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기도를 계속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반복해서 계속 기도하지만, 얻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슬롯머신과는 달리 지성을 가진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복되는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혹 여러분의 기도 해야 하는 의지나 시간이 필요 없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는, 끊임없이 간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7절에서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주 유심히 보면,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 다음에, 713절 이하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하는 것, 찾는 것, 두드리는 것이 좁은 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우리의 편안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끈질긴 과부의 간구를 보십시오. 그것은 불의에 대한 원한입니다.

끊임없이 간구해야 하는 기도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끊임없이 간구해야 하는 기도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복적인 무의미한 기도들은 문제가 있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불의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악한 세력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에서 우리의 반복적인 기도는 필요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과의 신뢰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먼저 종교적인 기도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분명하게 지적하는데,

마태복음 65절에 보면,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대표적으로 종교인들에 대하여 질책하시는 장면입니다.

 

때로 기도가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날마다 14분 정도 묵주기도를 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하고, 혹 실수로 건너뛰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매일 기도하는 항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해진 시간을 지키면서 무엇보다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기도의 본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시간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어떤 사람과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하면 스케줄을 조정하면서도 시간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러한 시간이 아주 루틴하게 진행되면서, 관계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식적인 시간이 되어갑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우리는 관계가 아니라 비지니스가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에도, 우리의 만남과 기도가 습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면, 우리의 관계는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아직 그렇게 바쁘거나 유명한 사람이 되지 못했음에도, 사람들이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오는 경우에 부담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생활과 스케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그렇고,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과 내가 이야기를 하는데, 매일 시간을 약속하고 살아간다고 하면 무지무지하게 피곤하고 힘들 것입니다.

 

때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입니다.

 

며칠 전에는 아들 웅기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컴퓨터 언제 사줄 거예요?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DDR을 받았는데 집에 있는 컴퓨터의 메모리가 부족해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줄게. 걱정 마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가 금방 옵니다. “언제 사줄 건데요?” “글쎄 사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고 끊었는데,

금방 예진이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아빠 컴퓨터 웅기걸로 사주는 거예요? 아니면 예진이 걸로 사주는 거예요?”

 

그래. 같이 쓰라고 사주는 거야!”

그랬는데, 바로 또 전화가 오는 겁니다. “아빠, 그럼 누구 방에 놓는 거예요?”

이쯤 해서 나도 화가 났습니다.

전화 끊어! 좋은 말 할 때

 

자 이제 여러분이 이 대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마지막에 아빠가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서 문제가 있는 가정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아들과 딸이 아빠와 시간약속도 하지 않고 전화를 하는 것을 보니까 아주 예의가 없는 집안처럼 보이십니까?

 

나는 이것이 정상적인 가정과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편한 겁니다. 때로 우리의 요구가 부당하여 야단을 맞을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종교입니까? 아니면 관계입니까?

 

자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 두 가지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먼저,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해서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응답을 받는 비결은 끈질기게 반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데 있습니다.

 

조지 뮐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세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1.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람, 즉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2. 하나님을 반쯤 신뢰하는 사람, 즉 한 발은 교회, 한 발은 세상에 두는 반쪽 신앙의 사람입니다. 대단히 위험한 신앙으로,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결국 무너지는 신앙입니다.

 

3. 하나님을 100%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100% 신뢰라는 말을 온전히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지 뮐러가 기도의 응답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는 특히 고아들의 아버지로 수없이 많은 고아를 먹여야 하는 순간에, 먹을 것이 없었던 위기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생애 5만 번의 응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기도의 응답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마치 자식에 부모에게 요청하는 수없이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기도는 -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때로 우리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그리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좀 더 신실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에 대해 설교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언젠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보지만, 성경을 보지 못하는 내 모습 속에서, 그리고 교회 일을 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시간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를 마친 후에, Q.T.를 하려고 오르띠즈 목사님의 책을 폈을 때였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이런 문장이었습니다.

 

기도는 지겨운 노동이나 형벌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에게 굉장한 도전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기도하는 대부분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라는 선물을 그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로서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은 기도하는 기쁨보다는, 기도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책을 펴는 순간 나의 눈에 띈 것은,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는 순간부터 기도는 하나님과의 기쁨의 만남이 아니라 노동이나 형벌로 변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밤을 새우고 기도하려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스스로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러나와야만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애인을 만나러 갈 때 남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기 전에 여러분에게 마술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정삼희 목사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겠습니다. “빨개져라!”

 

정삼희 목사가 전도사였을 때 연애를 할 때입니다. 시간만 나면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전화할 때는 복도로 나갑니다. 수시로 전화를 하는데, 늘 즐거운 표정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다 밤 9시가 넘어서 나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와 보니까, 정삼희 목사의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사연인즉 그 시간에 연인을 만나러, 유성까지 갔다 왔다는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일이 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모습 아닙니까?

 

기도에 이러한 모습을 적용하여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려고 교회에 나와 엎드렸는데, 우리가 노동처럼 느끼고 하나님 앞에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혹 여러분 중에 체면 때문에, 적어도 내가 10, 30분 혹은 1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슬퍼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도 시간이 가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나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기도가 형벌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는 종교인들의 모습 말입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서 매일 의무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기도가 마치 형벌처럼 되어 있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고해 성사를 할 때, 신부가 사람들의 범한 죄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에게 기도할 시간을 정해줍니다.

 

만약 죄가 거의 없다면 그는 10분 정도의 기도 시간을 할당해 줍니다. 이에 비해 중죄를 지었으면 100분 아니면 300분 정도로 줍니다.

이렇게 죄의 경중에 따라서 기도의 양도 비례합니다. 마치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돈으로 계산하지 마십시오.

 

우리 중의 아주 많은 사람, 아주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 이런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기도한 시간의 양만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겠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기도의 시간만큼 헌신의 양이 늘어나야 함에도, 우리는 그 시간만큼 우리가 편해지거나, 물질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 가장 절실하게 기도하셨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첫 번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 잘 감당할 힘을 얻기 위해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기도(마태복음 4)를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금식기도를 하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금식을 통해 가장 약한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강한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지요. 우리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협박하기 위해 금식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기도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기도의 양만큼 예수님은 당신 앞에 주어진 사역을 기꺼이 감당하셨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244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예수님의 가장 절실한 기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될 기도의 대가를 계산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주실 것이요, 만약 내가 좀 더 많이 기도한다면 나는 더 나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기도에 대해 이러한 관념은 일꾼이 삯을 받고 그 대가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일종의 감수하기 힘든 고역이자 희생이 됩니다.

 

또 한 가지 이러한 예를 들어볼까요?

커피숍에 있는데,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가 다가와서 커피를 한잔 드릴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래서 기꺼이 차를 마셨는데, 나갈 때 보니까, 그 사람이 써빙하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분이 금방 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호의가 상술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러 왔다고,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호의를 보여줬지만, 우리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고 하면, 하나님은 아마 아주 슬퍼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슬퍼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세월을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많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다른 두 가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아주 좋은 예가 요한복음 21~5절에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제일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셨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만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한 곤란한 사정을 알게 된 마리아는 예수께로 가서 이야기하기를,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하인들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점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문제를 가져갔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님께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포도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아, 포도주를 만들어라.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문제는 하나님께 아뢰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듣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하는데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늘 해결책을 미리 가지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지고, 또는 염려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데, 자꾸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강요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을까요?

 

마리아는 오직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결정권은 주님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기도하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다른 말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르띠즈 목사님이 상담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여러 번 겪었던 어떤 상황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떤 부인이 나를 찾아와서

 

목사님, 몇 주 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제가 당한 일인데요, 들어 보십시오. 그때 저는 업무상 일꾼이 필요해서 주님에게 좋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한 사람이 왔더군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으로 믿고 그 사람을 고용했지만, 그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사기꾼이었고 그로 인해 제 기도는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기도를 하셨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주님이 좋은 사람을 저에게 보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하나님이 자매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은총은 바로 이 머리랍니다. 지금 자매님은 이 머리를 사용하시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자매님이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면 이 두뇌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에게 왔을 때 당신은 이력서나 추천서, 아니면 자격증 등을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과연 그 사람이 적격자인지를 자매님의 머리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적격자가 아니면 고용하지 말아야지요. 그러한 경우에 사용하라고 이 머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 중에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성령의 이름을 빙자한 사람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는 많은 경우가 무엇이냐면,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는 기도해 보니까 이렇습니다.”라는 말이지요.

 

왜 여러분에게 이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관계된 분이시고, 나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하면, 왜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된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아주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에 빠지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기도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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