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설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 / 김양인 목사

성북동 비둘기 2023. 5. 1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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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36 / 김양인 목사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어느 안식일에 나사렛 마을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그곳에 모인 회중 앞에서 이사야서의 이런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여기까지 읽으신 후에,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 맡은 자에게 주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이 예언을 회중 앞에서 읽으신 것은 자기가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민 이스라엘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세울 때에 그의 머리에 올리브유를 부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졌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직무를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올리브유를 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한량없이 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아의 사명을 능력 있게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해방자의 역할입니다.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희년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희년이 되면 남에게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이 놓여나 자유인으로서 권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또한 남에게 팔았던 토지를 되찾게 되어 가난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언제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셨으며, 희년을 시행하셨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언행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크신 능력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거절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 정치보다 더 위대한 인류 구원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자유와 해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러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남의 종이라고 하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진리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정치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쉽게 풀어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우리 양심이 자유를 상실하고 죄책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것은 죄의 종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과 같이,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이때 그 사람이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죄가 그 사람을 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가 그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일평생 그 사람을 종으로 삼아 죄 된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 삼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소원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악한 언동을 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선한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죄를 짓기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죄의 유혹을 거부하고 선을 택해야지, 죄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순간부터 죄의 종이 됩니다.

 

가인의 경우가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가인은 그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 데 대해 회개하지 않고 동생 아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않으면,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6:23)이라고 하신 대로 죄를 짓는 사람은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불의하고 죄악이 가득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기를 거부하고 죄의 종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한번 죄의 종이 되면 죄가 넣어주는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알고 즐겨 악을 행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점점 더 사악해 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의 종 된 인생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죄의 종 된 인생들에게 진리를 말해 주어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신 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그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셨습니다. 죄의 종 된 인간들은 누구나 심판을 받고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인생들을 자유케 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달려 인생들을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정당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은 곧 죄의 종 된 신분에서 자유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자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524절에 이르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에게 속했던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죄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절대로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이 간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1절에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씀한 자유란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회에 이 같이 권면한 까닭은 그 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찾아와서 잘못된 교리를 전해 주어 신자들의 신앙을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인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자들로서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도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정한 식물을 가려 먹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거짓 형제들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니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4절에서, 사도는 말씀하기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그릇된 교리를 전하는 자들을 겨냥하여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이 도리는 이방인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신자들에게도 똑 같이 해당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율법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거룩하며 의롭고 선합니다(7:12).

 

 

 

그렇다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죄의 가증함과 흉악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713절에 이르기를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3:20).

 

무엇이 곧은지 굽었는지 알려면 표준이 되는 자를 가지고 대어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로 자를 카논이라고 하는데 기준, 표준, 규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을 카논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를 계명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도들은 율법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구원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들은 율법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므로 율법이 더 이상 예수 믿는 성도들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정한 음식을 가려 먹는 것 등등을 구원의 조건인양 주장하는 것을 가리켜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율법주의자들조차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에 무지한 자들이요 스스로 속이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내부에는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의도는 성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다시금 율법의 정죄 아래로 가두려는 것이므로 우리는 율법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굳세게 서서 다시는 율법의 종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많은 사람들을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에 귀신들이 두려워 떨며 떠나갔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데려 온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보게 되자 사람들이 다 놀라 말하기를 이 분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5)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들이 떠나간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귀를 제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38절에 이르기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패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며,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귀의 나라가 무너지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이 자유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낼 권세를 주셨습니다.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6:)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귀신들은 무서워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아서 우는 사자가 삼킬 먹이를 찾아 헤매듯이 최후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이르기를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이 성경이 말씀하는 말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믿음에 굳게 서고 복음의 진리로 무장해서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에게 종 된 상태에 있는 불신 이웃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두려워하고, 가난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게 되면 어쩌나 두려워하고, 실직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하면 어쩌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또는 불시에 무슨 사고를 당하면 어쩌나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그처럼 무병장수를 위해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에 좋다는 식품이나 의약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돈 있는 사람들은 노화방지를 위해서 한 번에 수백만 원이 넘는 줄기세포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은 죄와 벌이라는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형수는 처형되기 직전에 생각한다. 설령 겨우 서 있을만한 여지밖에 없는 좁은 바위, 영원히 가시지 않을 암흑과 고독, 그리고 폭풍의 망망대해에 둘러싸인 그런 바위에 선 채 수천년, 아니 영원한 세월에 파묻혀 산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이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 낫다, 오직 사는 것, 살아나가고 살아내는 그것이 어떤 인생인들 상관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0대 후반에 급진주의 정치 모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형장에 끌려가서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와 벌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한 말은 곧 그 자신의 고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을 이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빈부귀천의 구별이 의미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도 속수무책입니다. 고린도전서 1526절에 이르기를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생겨났으며 인류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망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약속이 있으므로 육신의 죽음을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죽으면 몸은 부활의 날까지 땅속에서 잠자고 영혼은 천사들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함께 와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말하지만, 천국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 온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와 동일한 소망을 받은 사람이므로 죽음을 두려워말고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에서의 자유, 마귀의 권세에서의 자유, 죽음에서의 자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중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진리를 좇아 살아감으로 받은바 영적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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