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설교

광야를 아십니까? 신1:29-33. 2020. 7/26

성북동 비둘기 2023. 5. 1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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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광야가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여정을 밟은 곳이 이 광야입니다. 저들이 홍해를 건넌 뒤 여러 광야들을 지났습니다. 예를 들어 수르광야, 신광야, 바란광야 그리고 시내광야입니다. 다음으로 가나안 땅 안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곳이고, 다윗이 도피생활을 했던 곳이고, 그리고 세례요한이 사역했던 곳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광야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40년을 살았던 미디안광야와 바울이 3년 훈련을 받았던 아라비아광야 등입니다. 그러면 이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글자 그대로 넓고 거친 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는 연평균 강수량이 200mm 이하입니다. 물이 없어서 가축을 기르기도 힘들고, 농사는 더더욱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못하고 버려진 곳입니다. 게다가 길을 찾기도 힘들고, 뜨거운 태양을 견디기가 힘들고, 일교차가 커서 특별한 사람들 아니고는 여행조차도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광야는 특별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광야를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םדבר)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으로부터라는 뜻이고, ‘드바르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볼 때 글자 그대로의 광야의 뜻은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가 말씀이 들려오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요 그래서 버려진 땅으로 생각했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땅 다시 말해서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여기 모인 분들 가운데 이 광야를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내가 원하든, 윈치 않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이 광야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환경과 처지는 달라도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의 광야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습니까? 아니면 직장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까? 또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내가 지금 이 광야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이 광야 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광야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싫어하는 고난과 환란의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까? 우리 인간은 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의 자국을 남긴 큰 그릇으로 쓰여진 사람들마다 다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부분 광야를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의 광야의 길을 걸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 노예근성을 뽑기 위해서입니다.

 

1:31절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기억나나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300Km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 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 43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에 종노릇을 한 백성들입니다. 4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노예문화가 있었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이 노예근성은 하루아침에 뽑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뽑혀져야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뜻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여기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무슨 말입니까? 순간순간 조금만 힘이 들어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들을 광야에 내버려 두지 않고 안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으셨는데, 마치 아비가 자식을 안는 것같이 안으셨다는 말씀이 바로 눈앞에 있는 커다랗고 선명한 글자처럼 제 마음에 확 들어와 닿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40일만 안으면 될 걸 40년이나 안으셨습니다. 누가 더 힘들었지요? 길을 가는 백성들보다 하나님이 더 힘든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40년 동안 안고 그 광야 길을 가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힘들어 할 때, 위험할 때, 아플 때, 모른척하거나 도망가겠습니까?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안아 가슴에 품든지 등에 업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아버지가 버릴지라도 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하나님은 버려두거나 모른 채 하지 않고 안아주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의 품에 바짝 다가가 안겨야합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당신을 주목하시고, 당신의 아픔을 소중히 여기시며 나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 광야라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2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 광야는 두려움의 현장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그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에 많은 위험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연히 그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물을 구하지 못해 모세에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마실 물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들도 물을 달라고 엉엉 웁니다. 짐승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질 것 같은 정말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천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들 안에서도 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늘 불안하고 지루하고 힘들고 짜증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광야생활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걸어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되었습니다. 이러니 모세가 너희는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 광야를 지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과장된 소리를 하는 것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세는 이처럼 험난한 광야생활을 놓고 백성들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혼자만 구름을 타고 다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똑같이 고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 광야에서 수백만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피를 말리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광야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걷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숨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의 것, 곧 눈앞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기 32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광야 길에서 자신과 민족을 안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지만, 백성들은 환경과 상황만을 보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차이입니다.

 

보세요. 광야의 백성들을 보십시오. 20:5절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 광야는 파종할 것도 씨를 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먹을 물이 있나요? 음식이 있습니까?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는 그야말로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묻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근본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여시던 하나님,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던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시던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고백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오늘의 나의 어려움 앞에서는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또 다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 함께 하시는 광야

 

33절입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도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하나님은 위대한 인생 가이드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 앞서 가십니다. 우리에게 될 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820절을 보면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낙심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변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예배마저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는 오늘의 상황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결코 상황에 위축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고후4:8-1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욱여싼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 우리를 아무리 답답하게 조여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 어떤 세력이 우리를 거꾸러뜨리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초월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로 우리도 일어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 갈망이 이 광야길을 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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