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북부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교회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5백년 이상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교회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이 교회에 대해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인물과 관련된 부분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행18:24)”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 ‘아볼로’는 바로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아볼로에 관해서는 바울서신 고린도전서에 여러번 언급되고 있으며, 디도서 끝부분에도 그 이름이 잠깐 나오지만,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내용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아볼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지중해연안에 세워진 신도시였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자신의 공적과 헬라문화의 우수성을 기념하기 위해 B.C.300년경에 신설한 대도시였다. 해상과 육로가 모두 열려있는 편리한 입지조건과 개방적인 분위기, 또 헬라문화를 꽃피운 신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상인들과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고, 그 명성은 로마시대에까지 이어져,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아테네 못지않은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는 학문의 도시답게 박물관이나 도서관, 그 밖의 교육과 문화활동을 위한 시설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많은 유대인들도 이곳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B.C. 1세기 경, 이곳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번역되기도 했다.
아볼로는 바로 이 도시 출신으로, 이러한 도시의 분위기에서 마음껏 학문에 정진해 탁월한 지식을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을 접하고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짐작컨대 그는 신앙이 깊고, 동시에 학문도 깊었던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24절에 나와 있듯이 그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다. 그런데 ‘학문이 많고’를 다른 성경에 보면 ‘달변가’ 혹은 ‘언변이 탁월한 사람’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아볼로는 당시 최고의 문화, 학문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 문법, 수사학, 천문학 등을 익힌, 거기다가 언변까지도 뛰어나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데 완벽한 자질을 갖춘 유능한 성경학자였던 것이다.
아볼로라는 이름은 ‘파괴자, 침략자, 웅변가’라는 뜻인데, 아마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어울리는 이름으로 보인다.
●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가 어떤 이유인지 불확실하나, 에베소에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장사와 종교교육을 겸하면서 돌아다니는, 일종의 ‘이동 상인’과 같은 유대인 나그네가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다. 아볼로가 등장하기 약 10년 전에 활동한 어떤 사람은, 티그리스 강 동편에 있는 아디아베네의 왕가를 유대교로 개종시켰으며 이후의 신앙교육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들은 상당한 지식과 세상 지혜를 겸비하고서, 왕족을 비롯 귀족들까지도 상대했던 독특한 상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볼로가 바로 이런 ‘이동 상인’인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처럼 나그네 유대인이었던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떤 경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아볼로는 이 도시 저 도시,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거나 혹 초청을 받고 가서 성경을 강해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후 52년 여름, 이런 가운데 아볼로는 에베소로 오게 되었고, 평소처럼 에베소 어느 회당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막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이사해 와 있었고, 이 신실한 부부 역시 회당에 나가 유대인들을 접촉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회당에서 보니, 처음 보는 한 젊은이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구약성경에 기초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그리고 열성을 다하여 담대히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젊은이는 메시야 예수님의 존재와 세례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까지만 알뿐,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에 대해서는, 이 유능한 젊은이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복음에 대해 아볼로에게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이 젊은이를 집으로 초대하여, 더 많은 교제를 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듣고 보고 배운 바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러주게 되었고, 아볼로는 자신에게 부족했던 예수님에 관한 지식과 복음의 진리를 채워줄 수 있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아볼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발견할 수 있는데, 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볼로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서, 그 당시 누구와도 필적할만한 뛰어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요, 구약에 정통한 성경학자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언변의 설교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칠것 없이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던 젊은이는, 처음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중년의 부부에게, 복음의 진리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들 부부가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요, 지위가 높거나 학문이 깊었던 것도 아닌, 천막을 만드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아볼로는 놀랍게도 이들 부부의 말에 거부하지 않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겸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보다 힘이 세고, 능력도 뛰어나고, 나를 압도하는 어떤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겸손은 상대방이 나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와 전혀 다른 가치관과 생각, 생활방식을 갖고 있어, 내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겸손은 진정한 신앙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그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의 존재를 발견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겸손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이런 점에서 아볼로는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의 이같은 겸손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학문적으로도 깊이 있게 이끌었을 것이다.
● 27절 이하에 보면, 아볼로는 업무상 에게해를 건너 아가야 곧 고린도에 가게 되었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비롯, 에베소교회 믿음의 형제들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아볼로를 잘 영접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띄웠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그 말에 따라 아볼로를 아주 귀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믿음의 가족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쳤다.
그런데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사도 바울의 경우, 유대인들이 멀리 원정까지 와서 핍박을 했었고, 돌로 쳐서 죽은 것을 성밖에 내다 버렸으나,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 선교여행을 계속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행18장) 앞부분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대적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더 이상 고린도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가 메시야라고 증거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볼로는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당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으며, 살기등등한 유대인 공중 앞에서 능력있게 저들의 이론을 파하고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아, 아볼로는 참으로 뛰어난 설교자요 웅변가요 변증가였으며,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위대한 복음사역자였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 사도행전의 기록은 행19:1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으로, 더 이상 아볼로에 대한 기록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볼로에 대한 다른 기록은 이어서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서로 다투고 편 갈라 나누어진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4개의 파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스도파, 게바파(베드로파), 바울파, 그리고 아볼로파였다.
이로 볼 때,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 끼친 영향이 아주 컸던 모양이다.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아볼로를 따르는 분파도 형성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두고라도, 게바, 즉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초대교회 당시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위대한 사도가 아닌가? 또 바울이 누구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특별히 세운 종이 아닌가? 그런데 아볼로가 이같은 위대한 인물들과 동급으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고린도교회에서의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면,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고전16:12읽기)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의 이같은 분파적 특성을 결코 이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향한 교인들의 추종 자체에 대해 꺼려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교회들이 깨어지고 갈라지는 근본 원인 한가운데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과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 아볼로는 자신의 재능을 앞세워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고, 베드로나 바울같은 사도는 아니었지만 진실로 복음만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사역자였다.
아볼로는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하여, 사도바울을 업신여기거나 불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바울을 비롯, 초대교회 사역자들과 동역하는 가운데, 참으로 훌륭한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아볼로를 언급하며,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아볼로의 사역을 높이 평가하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1537년 루터가 처음 주장한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볼로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 까닭은, 히브리서의 내용이 구약에 능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복음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 또 뛰어난 헬라어 문장력과 수사학적 능력이 없이는 기록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아마도 아볼로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여튼, 아볼로는 사도행전에 잠시 등장했지만, 그는 성경에 능통한 자이며, 예수님 이야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자로서, 탁월한 언변과 감화력으로 여러 사역자들과 교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에베소와 고린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뒤,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 이상과 같은 아볼로의 행적을 보면서 다시한번 정리하면,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구약에 정통한 아볼로가 천막 제조업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의 도를 배웠다는 사실은, 오늘날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일 아볼로에게 이같은 배우려는 겸손함이 없었다면 그는 내내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볼로의 심정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와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역자들의 심정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아볼로는 초대 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가로 인정받을 만큼 달변가였으며, 고린도 교회에 그의 당파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추앙을 받던 자였다. 그러나 결코 그는 자신의 재능과 능변으로 자신의 인기를 도모하지 않았고, 오직 그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만을 원하였다. 이렇듯 자신의 은사를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실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로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주를 위한 동역자로서 훌륭한 일치와 협력을 보인 아볼로와 바울, 또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지만, 불완전한 복음 이해에 머물러 있던 아볼로를 깨우쳐 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의 사역을 통해, 복음 증거에 있어 동역자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하며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울러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발견케 된다.
우리 동산교회에도 아볼로와 같은 참으로 진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면서도 겸손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이 나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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