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47) 가룟 유다(마26:14-25)

성북동 비둘기 2023. 6. 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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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반역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가룟 유다라는 인물이다. 지금도 양들을 죽이기 위해 도살장으로 다른 양들을 유인하는 데 사용하는 염소를 유다 염소라고 부른다. 배반행위나 가식(겉치레)의 호의를 일컬어서 유다의 키스라고 하며, 문 등의 몰래 들여다보는 구멍을 유다 구멍’(judas hole) 혹은 유다 창문’(judas window)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가룟 유다혹은 가룟 유다를 뜻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배반과 멸시, 혐오스러움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은 물론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는 어떤 부모도 자식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지 않는다. 하지만 가룟 유다가 태어날 당시에 유다라는 이름은 아주 명예로운 것이었다. 유대 나라의 가장 위대한 애국자들 중에는 유다 막카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며, 성경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여러 명이다. (1)메시야의 조상이 된 야곱의 넷째 아들, 즉 유다지파의 조상이 된 사람, (2)바벨론 포로 이전의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 (3)느헤미야 때에 예루살렘 성을 감독했던 사람, (4)예수님의 형제 중 한 사람 등, 하여튼 찬양, 찬미라는 뜻을 가진 이 유다라는 히브리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룟 유다를 뜻하는 이름과 다른 이름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영어단어에도 보면, 가룟 유다를 뜻하는 단어는 'Judas'(우정을 가장한) 배반자, 배신자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며, 나머지, ‘유다라는 이름은 ‘Judah' 혹은 ’Jude'로 표기하고 있다.

 

가룟 유다(Iscariot Judas)라는 이름은 케룟 유다(Kerioth Judas)가 와전된 것이다. 케룟은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마을로, 15:25에는 그리욧으로 나와 있다. 이름 앞에 굳이 이같은 지명을 붙인 것은 다른 모든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공교롭게도 12사도 중 11명은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유다만은 이같이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 유대지방 출신이다. 13:2에 보면 그의 아버지 이름은 시몬이었다.

 

유다에 관한 기록은 성경 외 다른 곳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데, 외경에도 이렇다할 언급이 없다. 후대에 나온 책에서는 다소 작위적으로 유다를 그리고 있다. 초창기 아랍 복음이란 책에는 유다가 어린 아이 때부터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여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열두 제자 가운데 뽑혀 3년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인물이었으며, 한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파송되어,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마귀를 내어쫓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여러 가지 정치적, 종교적 갈등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가룟 유다는 본인이 어떠한 입장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스승인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정치적, 종교적 희생양으로 내어주는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그가 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며 섬겼던 스승을 배반하고 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겼을까? 또 베드로와 달리 왜 가룟 유다는 자살을 택했을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가 자신을 팔 자임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삼으셨을까? 가룟 유다와 관련해서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또 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내용을 중심으로, 그동안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참고하여, 가룟 유다의 삶에 대해 확인하도록 하자.

 

먼저 간략하게 성경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통해 가룟 유다의 성품을 한번 정리해 보자.

 

(1)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어, 세리 출신 마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재무를 맡을 만큼 수리에 밝고 유능한 자.

 

(2)하지만 요한12:5,6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하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난한 자의 구제를 핑계로 공금을 착복하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 한 것으로 보아 간교하고 사리사욕에 밝은 자.

 

(3)“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을 정도로 뻔뻔하고 위선적인 자.

 

(4)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존경스러운 랍비 정도로 생각한 것으로 보아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고 믿음이 없는 자.

 

(5)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과 군호를 짜 맞춰, 어두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의 입맞춤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준 것으로 보아 매우 간교하고 음흉한 자.

 

(6)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길 정도로 배은망덕한 자.

 

(7)마태27:3~5까지 보면, 가룟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면서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 이로 볼 때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는 했으나,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자신이 지은 죄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로 전가시키려고 했으며, 결국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아, 고집스러우면서도 뚜렷한 책임의식이 결여된 자이다.

 

그러면 다시금 가룟 유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1) 가룟 유다가 어떻게, ,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까?

 

어떤 학자들은 가룟 유다가 애초부터 예수님을 배반할 의도를 가지고 그를 따랐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님이 유대 나라에 위협을 끼칠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아니 어떻게 조국을 침범하고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저 로마인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유대백성들을 강한 용사가 아니라 나약한 박애주의자로 만드는 예수는, 나라의 독립을 꿈꾸는 열혈청년 가룟 유다에게는 제거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목적을 갖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갈릴리까지 와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그들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가 바로 유다입니까?’ 하고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라 배반할 자가 저입니까?’하고 물었다. 이로 볼 때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룟 유다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치밀하게 제자들을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가룟 유다는 제자들이 보기에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예수님의 교훈에 감화되고 능력에 탄복하여 예수님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을 목격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자, 야고보나 요한,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처럼 메시아 왕국을 꿈꾸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대부분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유대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룟 유다도 젊은 유대인으로서 예외 없이 정치적 야심을 갖고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대지역 출신이다. 쉽게 말해 갈릴리 시골 어촌 출신이 아니라 수도 예루살렘 인근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교육받을 기회도 많았을 것이며, 타지역에 비해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서 태어나서 그 지역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대지역에서 태어나 갈릴리 지역까지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아, 세상 경험도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소박하고 단순한 갈릴리 어부들에 비해 세상물정과 재리에 밝았으며, 제자로 선택될 당시 그의 인물됨이 아주 신실했기 때문에, 타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인 마태를 젖혀 놓고 일행의 재무를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무슨 이유로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며 섬겼던 스승을 배반하고 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겼을까?

 

그는 주님으로부터 사도로 뽑힌 사람이다. 분명히 장점도 있는 유망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인류에게 주어진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최대 영예의 절정에서 멸망의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20C 이후에 가룟 유다에 대한 많은 연구와 문학작품이 나왔다. 어떤 작가들은 가룟 유다를, 자신이 희망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한 비운의 한 애국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가룟 유다는 정말로 예수를 사랑하고 따랐으나, 스승인 예수님이 차츰차츰 자신이 기대한 방향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주님의 언행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다시말해 정치적으로 로마와 대항해서 싸우는 다윗과 같은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자신을 포기하고, 속죄를 위한 죽음으로 내몰아가는 것을 보고, 그동안 품어왔던 자기의 모든 꿈과 계획이 무산됨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스승과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환멸감에 사로잡혀 스승을 팔고 자살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 자신이 유다를 물리쳤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배반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미 구약 성경에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6:70).” 그리고 마26:24에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런 가설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분명히 용납될 수 없다. 가룟 유다를 두고 유대를 진정 사랑한 애국자. 예수의 구속사역을 위한 숙명론적 상황의 희생자 등으로 미화시키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를 도적이요, ‘멸망의 자식이요, ‘마귀라고 평가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고 유다의 배반 역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유다의 배반이 결코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악한 의지와 생각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말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사람을 향해 랍비들이 자주 사용했던 속담적인 표현으로, 욥기3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유다가 처하게 될 영원한 고통을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야지, 처음부터 저주받은 인생으로 태어난 가룟 유다의 숙명론적인 처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행하기 전에 먼저 저주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지 않으시며,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이 선택할 길에 대하여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죄악에 대해 변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유다가 배신자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는가?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가장 큰 차이점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회의 감정이 일고 죄의식을 느꼈을 때, 함께 범죄를 공모한 대제사장들에게로 가서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가룟 유다는 그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결국 그의 종말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유다도 3년 이상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주의 사랑도, 타산적인 유다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서 이런 약점을 간파한 마귀는 일차 공략을 시도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것을 알아차린 주님은 염려가 되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내가 그 사람일까하고 수근거렸다. 성령께서 유다의 죄를 지적하셨지만, 유다는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주님은 얼마나 통탄하셨을까? 이제 세상을 떠나 제자들과 헤어지게 되었지만, 다른 열한 제자들과는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와는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다. 앞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주님을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에 그의 심령은 이미 온갖 인간적인 생각, 욕망, 불신앙으로 가득 차, 마비되어 있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그의 눈에는 메시아가 은화 30닢의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은화 30닢을 손에 넣게 되어 흐뭇하게 생각한 것은 잠시잠깐에 불과했다. 예수를 처형하게 되니 마귀는 목적을 달성했으나, 더는 유다가 필요 없었다. 그 눈가림이 제거되자 유다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은화 30닢이 하찮은 쇠붙이로 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는뜬 양심이 준엄하게 그를 고발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할고 죄를 범하였도다그는 이렇게 말하고 은화를 성전에 팽개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반기를 드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인류를 이 재앙에서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는 피를 흘려야 했다. 유다는 어째서 자기가 배반한 주의 십자가 밑에 와서 그의 피로 죄를 씻지 못했을까? 그는 끝내 메시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피권세가 살인한 강도도 낙원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들 그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멸망의 길을 줄달음쳐 스스로 그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다.

 

주님은 어찌하여 12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유다를 택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다의 생애는 인간이 아무리 큰 은총을 받아도 마음에 허점이 있으면 마귀의 밥이 되어 멸망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엄숙히 경고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가룟 유다를 두고 유대를 진정 사랑한 애국자요, 예수의 구속사역을 위한 숙명론적 상황의 희생자 등으로 미화시키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를 도둑이요, ‘멸망의 자식이요, ‘마귀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크리스천 젊은이들 가운데 제대로 성경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신앙경험이 부족한 경우,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주장이나 이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정병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힘을 쏟아야 하겠다.

 

물질숭배와 황금만능주의가 세상은 물론 교회마저 집어 삼키고 있다. 물질에서 자유로운 교회나 교회가 과연 몇 군데나 되겠는가? 하지만 가룟 유다를 통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분명히 인식하고, 돈의 노예가 아닌, 진정 물질을 지배하고 다스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효과적으로 선용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계속적으로 언급하심으로써 유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이 기회를 뿌리치고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했다. 죄 짓지 않고 완전무결한 삶을 살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죄 가운데 거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용서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통해 진정으로 회개하고 신속히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으나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는 그 역시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진정 눈물로 회개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주의 일에 매진한 것과는 극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유다처럼 자신의 죄악에 대해 단지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진정 죄를 저질렀을 때 베드로처럼 통회하고 돌이킴으로써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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