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51) 부자청년(막10:17-27)

성북동 비둘기 2023. 6. 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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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흔히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과 연결되어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오늘은 부자청년에 대해 살펴보겠는데, 부자 청년에 관한 기사는 공관복음에 빠짐없이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사건을 목격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교훈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건은 잘 기억되지 않지만, 생소한 경험, 큰 깨달음이 있는 경험, 지금까지의 사고와 가치관을 뒤흔든 경험 등은 오래도록, 그리고 선명하게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부자청년에 관한 기록은 성경 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10:32에 나타남), 아직 여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그리고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세 번째 예고하시기 직전, 예수께서 길가는 도중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무릎 꿇고 질문을 한다. 마가복음에는 단순히 한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 꿇어 앉아 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그 사람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누가는 관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관원이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의 나이가 30세가 지났다는 말이다. 유대에서는 30세가 넘어야 정식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라고 언급된 사실은 그가 비록 30세는 넘었지만 그 관직을 맡은 지가 오래지 않은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정리하자면,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앉아 질문한 사람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관직에 오른 어떤 부자 청년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의복이 화려했을 것이고, 관원으로서 몸가짐이 품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햇빛과 고생에 찌들려 검게 그을린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도록 훤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다. 이 장면은 분명히 제자들은 물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다소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 앞에 화려한 복장의 젊은 관원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1)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겸손과 신앙적 열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2)뿐만 아니라, 비록 외형적으로 모든 것을 갖춘 복된 삶이었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간절함, 어떤 영적 갈급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서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고, 예수님의 무리를 경원시 했다. 따라서 부자 청년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의 지위나 당시 유대사회의 분위기로 볼 때, 엄청난 모험이었고, 자존심을 다 내던진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이 부자청년이 질문하고자 했던 문제가 자신에게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당시 일반적으로 랍비에 대한 명칭은 선생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대하여 그가 특별히 선한 선생님이라고 칭한 것은 대단한 존경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생님앞에 이같은 말을 결코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하다고 번역된 말은 아주 탁월하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의 도덕적 성품보다는 종교적 성품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위대한 선생님이요 선지자일 것이라는 기대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부자청년이 예수께 질문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였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하고 질문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주 영생에 대해, 또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단락(10:13-16)에도 보면, 어린아이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에 대해 교훈하고 계시다.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 누가복음에도 부자청년 본문 바로 앞에 어린아이에 대한 축복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 본문은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하여튼,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적어도 이 부자청년은 평소 예수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위대한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스승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뿐만 아니라, 젊음과 재물과 권세를 갖고 있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영생의 길에 깊은 관심을 가진, 영적인 감수성이 풍부했던, 신앙심이 깊은 젊은이였다. 3)하지만, 이 부자청년은 영생이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과, 선한 일을 행하는(doing) 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being)가 되느냐, 즉 행함으로써가 아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써 얻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몇 가지 반문하시자 부자청년은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 하고 대답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율법만을 준수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것이 영생의 길이라고 믿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실천했는가의 여부를 먼저 물으신다. 그러자 청년은 그 모든 계명을 생활 법칙으로 삼아 거기에 순종하려고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모든 유대인 소년은 계명의 아들이 되는 12,3세 가량의 나이가 되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생활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계명을 배웠고 계명을 지키도록 훈련받았고 지금까지 그 율법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가책이나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외적인 순종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부자청년의 말처럼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청년은 율법이 요구하는 내적 순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영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영생에 대한 확신과 영적 기갈을 채우기 위해, 아직 자신에게 뭔가 부족한 것 즉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들, 유대인 교사들과 율법을 통해 배워왔던 계명들 외에, 혹시 또 다른 것이 있는지, 선한 선생님이신 당신이 나에게 가르칠 계명이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부자청년의 지금까지의 성실한 삶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과 신앙인으로서의 자만심에 가까운 자부심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위험한 생각이기도 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 준수에 대해 탁월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바리새인이란 말의 뜻이 분리하다, 구분하다의 뜻에서 나왔듯이, 부자청년도 당시 부유한 지도층 출신으로,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일반 서민들과는 분리된, 종교적 자긍심이 강한 바리새인이었으며,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신만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에는 특이한 표현이 등장한다. (21)을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부자청년을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그 청년을 주의 깊게 응시하는 가운데, 그의 열정적인 종교심과 성실함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사랑하사대견해 하시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준수에 대한 그의 노력을 칭찬하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곧 이어 이야기할 한 가지 부족한 것의 준수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부자청년의 가상한 노력을 칭찬하시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20절에서 부자청년이 다 지키었나이다란 대답에 대한 허구성의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실제로 청년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많은 재물이 영생의 길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노출된 진정한 그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온갖 아름다움을 다 갖춘 부자청년이었으나,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영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완수했다고 장담했으나, 결코 이 땅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하나님 아닌 또 다른 주인이 자신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주위에 둘러선 제자들에게 부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에 대한 교훈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심히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였고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도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예수는 물질에 집착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격언을 사용하여 생생하게 설명해 주신다. 당신의 격언 가운데 절대 불가능한 일을 말할 때 팔레스틴에서 가장 큰 동물이었던 약대가 바늘귀, 즉 가장 작은 구멍으로 나가는 것을 비유로 사용했다. 이러한 격언을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시키는 것은 물론 과장적인 표현이나 재물에 대한 사랑은 합법적으로나 불법적으로나 간에 사람으로 하여금 재물을 쌓는데 전념하도록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주지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부자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두기가 쉽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실로 재물에 대한 집착은 영혼을 세상에 얽어매어서 천국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25절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라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서 등장한 부자 청년의 경우 모범적으로 계명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자, 제자들의 놀람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의 관념 역시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인데 부자가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구원은 구원의 대상인 사람편의 능력에 있지 않고 구원의 주체되시는 하나님 편에 있다는 구원론의 대강령을 제시하신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은혜로 이를 하실 수 있고 또 행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이 사실을 제자들이나 부자 청년의 질문과 연관지어 볼 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제시된 소유에 대한 포기와 더불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믿음으로 그분의 능력에 맡길 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성경은, 이 부자청년이 나중에 다시 예수께 돌아왔는지,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비록 율법과 계명에 충실하게 살았으나, 영생의 길을 위해 이 땅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꽉 쥐고 있었던 부자청년는 근심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본문은 영생을 사모하던 진지한 부자 청년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및 이에 덧붙여 주신 교훈의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이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볼 때 부자 청년은 성실하고 평범한 대다수 인간의 대표로서 예수께 질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부자 청년에게 주께서 단 하나의 단점이자 치명적 단점인 이 세상과 천국을 분명히 구분하여 천국 중심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점을 지적하신 사실은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비단 재물 뿐 아니라 학식, 명예, 권력, 심지어 건강과 미모 등 이세상의 세속적 가치를 하나님 나라보다 우위에 두는 것, 다시 말하면 당장 눈에 보이고 유익을 주나 일시적이고 죄로 소멸될 이 세상의 것을,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원하고 순전한 하늘 나라의 것보다 더 우위에 두는 타협적이고 주객 전도적인 신앙은 결코 천국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자기 소유의 포기는 이웃 사랑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자기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모든 소유욕과 외식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주심과 같은 타인을 향한 철저한 사랑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요구는 오늘 우리들을 향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영생을 갈망하는 자가 추구하는 삶인 것이다. 영생의 길로 들어가려면,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청년의 가장 큰 약점인 세상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지적하신 뒤 이를 포기하고 와서 자신이 가는 의의 길을 좇으라고 명령하셨다.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전적인 자기 부인과 복종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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