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29) 느헤미야(느1:1-2:10)

성북동 비둘기 2023. 6. 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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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뒤이어 상당수 주민들이 사로잡혀 감으로써 유다 왕국은 몰락한다. 그런데, 남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 제국은 단명하였다. 남유다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지 50년 정도 되었을 때,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벨론제국을 굴복시킨다. 바사 사람들은 관대한 종교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제국의 안녕을 위해 모든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남유다는 멸망 이후 포로생활동안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황폐될 대로 황폐되었으나,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드디어 B.C.537년 바사의 고레스왕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기쁨에 넘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일부 귀국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포로귀환이다.

 

앗수르나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기반을 둔 나라였다. 그리고 바사는 지금의 이란 지역에 기반을 둔 나라다. , 같은 회교국가이기는 하지만, 이라크와 이란은 다른 민족이며 민족 기질도 차이가 있다. 앗수르, 바벨론제국을 형성했던 이라크 민족이 호전적이라고 한다면, 페르시아제국을 형성했던 이란 민족은 보다 포용적이고 평화적이다.

 

1차로 포로귀환하여 예루살렘성전이 재건된 지 약 60년 뒤, 바사의 아닥사스다왕 때에 다시 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학사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일부 유다 백성들이 재차 귀국하게 된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율법을 정비하여 유다백성들을 하나님의 선민다운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크게 힘을 기울였다. 이것이 제2차 포로귀환이다.

 

그로부터 또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바사의 아닥사스다왕 제20년에, 느헤미야라는 유대인이 바사제국의 고위관직에 있었다. 그는 아닥사스다왕의 술 관원이었다. 당시 왕의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을 비롯 왕의 음식을 맛보는 일과 왕의 침실을 맡아 보는 일, 그리고 경호하는 일까지 하기도 했다. 따라서 직분상 왕의 최측근에 해당했고, 당연히 왕의 행정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 술 관원이 군사지휘관인 총사령관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느헤미야의 친동생 하나니가 조국 유다 땅에 갔다가 다시 몇 사람을 데리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아마 하나니는 에스라가 주도한 제2차 포로귀환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는 궁전의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바사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조국으로 돌아간 하나니는 예루살렘의 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므로 역경을 무릅쓰고 유다에서 수산까지 천수백 km를 되돌아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형에게 전했던 것이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이처럼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된다.

 

하여튼 동생 하나니의 말을 들어보니, 고국에 돌아간 유다백성들은 큰 어려움은 겪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지고 그 성문은 불탄 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되었다.

 

원래 유다인은 애국심이 강한 백성이다. 느헤미야의 몸에도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고국의 동포를 그리워하면서 그는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몸은 비록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의 왕궁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자기 일신의 안일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며칠을 두고 비탄에 빠져 금식하고 하나님께 눈물로 자비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 1장이 바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기도한 내용이다. 당시 바사는 애굽을 정복하고, 헬라와 평화 조약을 맺는 등, 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던 때여서 속국들에게 매우 관대함을 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드디어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귀환을 주도하게 되었고, 바사제국의 공인을 받고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의 총독이 되어, 당시로서는 국가의 주권 회복에 상당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수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과 종교제도를 비롯 나라의 기반을 새롭게 정비하는 국가재건의 큰 일을 감당하게 된다.

 

느헤미야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하가랴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 “여호와께 위로를 받다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대로 유다백성들은 포로귀환 시대에 느헤미야라는 한 신실한 사명자를 통해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신앙과 행정력을 겸비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진정한 지도자가 참으로 요청되는 이 시대에, 느헤미야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고대하면서, 어떻게 느헤미야가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몇가지 특징적인 그의 성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동족을 사랑한 사람

 

위대한 지도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한결같이 애국심이 충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그리했고 여호수아가 그리했고, 다윗을 비롯 여러 성군들과, 수많은 선지자들이 모두 동족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온 세상의 왕이셨지만, 육신의 조국인 이스라엘을 위해 탄식하며 눈물 흘리셨던 분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애국자가 아닌 지도자는 극히 드물다.

 

느헤미야는 화려하고 풍족한 바사제국 수산궁의 안락하고 보장된 생활 중에 함몰되지 아니하고, 곤경에 처한 조국의 동포들를 돌아보았고,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슬픔으로 기도하며 금식하였다.

 

1장에서 보다시피, 느헤미야는 동족 전체가 저지른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동족의 아픔과 괴로움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단지 느헤미야한 개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깨닫고, 무거운 동족의 짐을 자신의 짐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그것을 지고 가겠다는 투철한 동포애와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뛰어넘는 이같은 큰 마음이 없이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구역을 보살필 수 있고 또 교회 각 기관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나아가 자기가 속한 기관이나 부서를 뛰어 넘을 수 있어야 교회 전체에 덕을 끼치고 교회 전체를 든든히 세우는데 기여할 수 있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나라의 위정자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백성들은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기도해야만 한다. “참으로 충성된 지도자를 정책결정의 고위직에 앉혀 주소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지 않고 모든 안락을 포기한 채 제3차 베벨론 포로 귀환의 주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성을 회복케 하였으며, 학사 에스라와 더불어 종교개혁을 주도,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외적, 내적 면모를 회복케 한 지도자였다.

 

신앙의 사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지도자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동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었고, 동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신실한 일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느헤미야가 동족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는 동족의 고난을 앞에 두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기도드렸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근거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황폐되었다는 말을 듣고 금식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아닥사스다왕의 질문에 대답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왕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는 적이 자신을 깔보고 일을 훼방하였을 때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하고 다만 하나님께 아뢰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손에 대적들을 맡겼다. 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도 기도만 했다. 적이 훼방하여 맥이 풀릴 때에도,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느헤미야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의지하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사실 느헤미야는 바사제국의 왕의 명에 따라 일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의 힘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었지만, 먼저 하나님께 무릎 꿇었던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에 앞서,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케하여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고, 이 말씀에 입각하여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고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참으로 진정한 개혁과 재건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인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것이야말로 힘의 비결이다. 우리는 어떤 역경에서도 감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신앙은 감사하는 중에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감사가 그치면 신앙도 그치고, 감사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중에도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그리고 성벽을 봉헌하는 날 온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리라(12:43).”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감사와 기쁨 속에 완성된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신앙의 모습이 있는가? 하루에 얼마나 감사하고 지내는가? 한주간동안 얼마나 말씀과 더불어 살고 있는가? 선택과 결정의 순간순간 얼마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진정한 지도자일 수 있다.

 

성실성과 책임성을 갖춘 사람

 

위대한 지도자치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많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실한 사람에게는 못당한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바사의 왕이 느헤미야의 표정에서 수심을 알아챈 것이나 그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아 평소에 얼마나 왕이 느헤미야를 가까이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최측근에서 자신의 안위를 책임질 사람을 누구를 세울까하는 문제는 역대 모든 권력자들의 숙제였을 것이다. 언제 정적에 의해 독살 당할지 모르고 위해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누구인가? 다른 나라에서 포로로 끌려온 노예에 불과했다. 그것도 철저한 애국심으로 뭉쳐있는 유다백성이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느헤미야는 바사의 태평시대에 바사 제국의 핵심에서 왕을 보좌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책임을 다하여 수행함으로써 인정받은 인물이다. 여러분도 지금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히 행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느헤미야가 왕의 윤허를 얻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총독으로 임명이 되어 귀환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을 시작하기 이전에 은밀히 성벽을 답사하고 성의 훼파정도를 정밀하게 파악할 만틈 신중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확실히 모든 일에 앞서 먼저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와 아울러 인간의 해야할 바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되리라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모든 일에 앞서 먼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되, 우리가 해야할 바엔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느헤미야는 결코 단독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열심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저지러기 쉬운 실수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고 협력을 당부했다. 당시 유다백성들 가운데는 동족에게서 고율의 이자를 받아챙기던 귀인과 민장들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총독의 급료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런 솔선수범의 모습으로 저들을 책망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여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나로 모아나갔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사업에는 특히 협력이 필요하다. 현대 교회가 사분오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업에 얼마나 큰 지장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느헤미야는 또한 조직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일을 추진했다. 각자에게 부서대로 일을 맡겨 일사분란하게 일해 나아갔다. 하나님의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난감하게 해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어 각각 특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존중하고 협력해야만 하나님의 성업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느헤미야의 성실성은 곳곳에 나타난다. 그는 기도하는 한편 밤낮으로 파숫꾼을 두어 적에게 대비했다. 백성의 절반은 공사장에서 일하고, 절반은 창과 방패와 활과 갑옷으로 무장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사람은 각자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에 무기를 잡았다. 성을 쌓아 올리는 사람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렇게 무장을 하고 나팔을 불면 곧 모이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그 옷을 벗지 않고, 물 뜨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적진의 한복판에서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하나님의 공사에 종사하고 있다. 작은 기회만 있으면 훼방하려고 노리고 있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도 결코 무장을 해제해서는 안된다. 일상생활에서도 적과 대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처럼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한 손에 창을 들고, 그 눈은 적을 노려보면서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야 한다. 그 조화 속에 성공의 비결이 있다.

 

성벽을 쌓아갈 때 얼마나 많은 외적, 내적 방해가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성실성과 책임감, 그리고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52일만에 역사를 필하여,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느헤미야가 되어, 충성스럽게 이 직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 지역 사회, 바로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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