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28) 예레미야(렘1:1-19)

성북동 비둘기 2023. 6. 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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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선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예레미야선지자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사야선지자보다 약 100년 후인 남유다 요시야 왕 때 부름을 받았는데, 소명받았을 때 약관 20세 정도였다. 그래서 예레미야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부르실 때, 자신을 어린 아이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불확실하나,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여호와께서 높이신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예레미야선지자는 남유다의 마지막 다섯 왕인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여호야김, 시드기야왕 때 선지자로 활동했으며,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할 때인 B.C.580년경까지 약 50년 동안 사역한다.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의 당시 국제 정세는, 비록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긴 했지만, 바벨론과 앗수르가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남유다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다로서는 다소 평화로운 상태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선한 왕 요시야가 등극하여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등 내실을 다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요시야왕이 므깃도에서 애굽왕 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한 뒤, 남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 대상으로 삼았고, 이후 왕들의 악행과 실정이 계속됨에 따라 유다는 급속히 쇠퇴의 길로 치달았다. 암흑과도 같은 혼란한 시대가 지속되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몹시 피폐해졌다. 종교도 썩을 대로 썩어 일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는 들끓느니 간음하는 것들뿐, 온갖 악행으로 냄새가 진동하구나. 예언자도 제사장도 썩어 빠져서 못된 짓이나 꾸미고들 있다. 내 눈에는 너희가 모두 소돔과 고모라같이 보인다. 여호와의 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멸망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의 소명은 어렵고도 힘든 것이었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 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이것이 예레미야가 외친 여호와의 메시지였다.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살아날 길은 전혀 없다. 적국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한다.”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라가 어려운 때에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터인데, 예레미야는 '평안하다 소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당시 다른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같은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왕을 비롯, 모든 방백들, 백성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만 전파하니, 예레미야의 삶은 한마디로 가시밭길이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자기 스스로도 이같은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하기 싫다고 반발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예레미야의 이같은 경고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던 남유다는 결국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첫 침공을 당한 이래, 거듭 침공을 당함으로써 BC586년 마침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소명받는 장면이다. 예레미야는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거부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불렀다. “예레미야, 나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너를 구별하여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러자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하고 소명을 거절한다.

 

여호와께서 다시 예레미야를 격려하신다. “걱정하지마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서 내 말을 전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겠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술에 대시며, “내가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두었노라.” 하고 소명을 확정시켜 주셨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듯이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의지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하나님께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끔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하나님, 저는 어리숙하게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입을 열면 어떤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저의 뼛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결국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정말 힘들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아우성이고, 결국 미움과 구박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어느 때는 왜 태어났나 싶습니다. 정말 이렇게 수모를 받고 생애를 마쳐야 하는 건가요? 말씀을 해 보세요.”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이 어려운 때, 온 백성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던 영적 절망기 때,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아, 참으로 어려운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그가 어떻게 이 어려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참으로 어려운 때에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혜성처럼 나타나, 벼락같이 아합에게 항변한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혹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담대한 아모스와 같은 사람이 적임자가 아닐까? 적어도 위풍이 당당한 이사야와 같은 인물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달랐다.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눈물이 많은 여성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20세 안팎의 젊은이로, 어려움을 당하면 좌절되기 쉬운 미숙한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든지,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기도 하고,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낙심하기도 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이런 어려운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부적당한 그릇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흔히 이런 부적당한 인간을 들어 쓰신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재능이나 특성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되는 것이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께서 타락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시기 위해 선택한 것은, 태풍과 같은 강력한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눈물이었다. 인간의 죄를 정면으로 질책하고 그것을 후련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쩌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화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하고 질타하시고 개탄하셨던 예수님은, 동시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23:37)”하고 사랑과 눈물로 이어져 있다.

 

조지 휘필드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은, 오른손을 위로 쳐들고, 왼손으로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막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하고 수천 명의 청중에게 호소했고, 휘필드의 눈물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통회했다고 한다. 멸망과 징계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눈물의 예언자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어쩌면 예레미야의 눈물은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그것도 선지자가 눈물이 많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성 여리고 눈물 많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에, 선택하셨다. 그리고 불완전하고 유약하기까지 보이는 예레미야를 들어 그 힘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인가? 오늘 같은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비록 여러분이 천성적으로 강인하지 못하고, 결단력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 백성다운 빛나고 멋진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때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넘어지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외모로 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여러분의 약점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연약하고 부족하여 숨기고 싶은 단점을 들어,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장 유용한 것으로, 가장 값진 것으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어난 예레미야는 끝까지 그 말씀대로 움직였다. 물론 괴로움이 너무 심하면, 어린 아이처럼 토라진 모습처럼 보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반면에 고지식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여러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13:1-8)”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아이들 장난 같은 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그는 고분고분 순종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중을 밝히셨다. 하나님의 깊은 의중은, 이처럼 절대 복종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실증해 보는 자에게만 밝혀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대로 따랐다. 순종하는 것은 가장 복되게 사는 길이다.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18:16) 예레미야 자신이 먼저 흙점토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시 빚어져, 불완전하던 그도, 마침내 하나님의 심정이 담긴 모습으로 변화가 되었다.

 

눈물은 산산히 깨진 마음에서 솟아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빛은, 우리가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아름답게 빛난다. 뿐만 아니라, 더욱 존귀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맛본 영혼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 다른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전에는 자기를 위해 운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함에 따라, 이제는 자기를 위해 우는 눈물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동족을 위해 울게 되었던 것이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도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위기와 고난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어찌하여 내 백성이 치료받지 못하는고.”

 

예레미야는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연약하고 이기적인 한 개인에서 벗어나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하였으나,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라. 여러분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분 자신의 지식과 수고와 성실함으로, 지금까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었는가?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은 헛고생하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달려갔다 해도, 하나님의 길이 아니면 다시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난도 뒤따른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고난 속에서 다듬어진다. 루터는, “성서와 기도와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인격의 깊이와 높이, 넓이는 그가 겪는 고난의 깊이와 높이, 넓이에 비례한다. 하나님께서 기쁘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고난 학교의 학생이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예레미야의 생애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이웃은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따돌림 받았고 그의 예언은 조롱거리가 되고, 그가 쓴 글은 불에 소각되고,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힌 후에, 드디어 애굽으로 끌려가 다바네스에서 돌에 맞아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애에서 아무 성공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그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다가 70년 후에 풀려났다. 그리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예언은,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소년 다니엘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지게 되었고, 다니엘은 포로 시대에 이방 나라에서 역대의 왕들을 섬기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여 70년 후 고레스 왕이 석방령을 내릴 때까지 이르렀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 후계자가 된 다니엘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레미야가 받아야 할 상과 영광은 이 세상에서 받기에는 너무나 엄청났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는 그에게 상을 하나도 내리지 않고, 모두 저 세상에 저장해 두셨다. 그가 받은 고통이 컸던 만큼, 그의 영광도 컸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7).” 주님과 고난을 함께 할 기회는 오직 이 세상의 생애에서 뿐이다.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은 큰 손실이다. 우리도 주님과 고난을 나눠 갖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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