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엘리사!)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 갑절의 영감을 간청하였고, 그것을 받아서인지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아만장군의 문둥병, 소금으로 물 근원을 고침, 마른 개천에 물이 가득차게 함, 과부의 빈 그릇에 기름이 차게 함,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되살림, 독이 있는 국을 깨끗케 함, 보리떡 스무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명을 먹임, 강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함, 아람군대의 눈을 멀게 함, 죽은 엘리사의 뼈에 시체가 닿자 회생함. 그밖에 수많은 예언과 투시의 능력 발휘, 천군천사를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리사는 비옥한 요단 골짜기 계곡 아벨므홀라 성 사람으로 사밧의 아들이었다. 그는 부름을 받기 전 평범한 농부였다. 스승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어 50년 이상 사역했는데, 국가적 위기 때마다 뛰어난 영력을 발휘하여 이방의 침략을 저지하고 나라를 지킨 것으로 위대한 선지자였다. ‘엘리사’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보면 사람의 외모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데, 왕하2장에 보면 엘리사가 대머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엘리사 활동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아합왕의 죽음과 함께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속국들의 배반과 함께 당시 북방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해 오던 아람의 잦은 침입으로 곤욕을 치르던 때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엘리야 이후 바알 종교의 영향이 한풀 기가 꺾이긴 하였으나 우상 숭배가 여전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 이시간 우리는 열왕기상하에 기록된 엘리사의 대표적인 행적을 통해, 엘리사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왕상19장에 나오는, 그가 소명받는 장면을 살펴보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 열두 겨리 소(즉 24마리)로 밭을 갈고 있었다. 다시말해 당시로서는 큰 부농 집안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부름받았을 때, 주저 없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른다.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해 질문하던 부자청년과는 대조적이다.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재물이 많은 까닭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부름을 받자, 부모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소 한 겨리를 잡아 밭 갈던 도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일어나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다.
한마디로 엘리사는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망설이지 않고 응답한 것을 보면 그 영적인 자질이나 영성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마태나 그 외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즉시 순종하고 헌신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첫째 믿음의 사람이요, 둘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요, 셋째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요, 넷째 모두가 충성된 사람들이었다.
꿈을 갖고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믿음의 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눈으로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달려가는 자와 항상 함께 하신다.
둘째, 왕하2장에 나오는 장면으로, 스승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끝까지 스승을 따라가며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 올리고자 하실 때,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기 위해 여러차례 권고를 한다. ‘너는 여기 머물라!’ 그러고는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다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다시 요단강 가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을 놓치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여 따라갔다. 결국 요단강을 건너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내가 네가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말하였다. 그때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요청하게 된다. 엘리사의 요청이 얼마나 당돌했던지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가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하나님의 손에 그 일을 맡긴다.
결국 엘리사는 불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가운데, 스승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봄으로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되었다. 사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구한 것은 단순한 은혜에 대한 욕심이나 엘리야보다 더 높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에 필요한 은혜를 구한 것이다.
끊임없이 여호와를 배반하는 강퍅한 북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스승 엘리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한 사명자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개인의 만족이나 쾌감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당할 사역과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축복은 내 개인을 위해 주시기보다 이웃과 우리의 사역을 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에게 허락한 은혜와 축복까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용하는 보람으로 만족한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 축복이 선용됨으로써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처럼, 은사나 은혜도 선용됨으로써 아름다운 결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양이든 여러 모양으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다.
이처럼,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던 엘리사는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이요, 인내와 열정을 가진 헌신자였다. 그리고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포기할 수도 없었던 지혜롭고 충성된 인물이었다.
셋째, 왕하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와 문둥병을 고쳐주기를 간구할 때에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음으로 병을 낫게 한 사건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나아만이 엘리사가 나와보지도 않고 자기 몸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요단강에 가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하므로 불쾌하게 여겨 돌아가려 했다가 그 부하들의 만류로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문둥병이 나았다. 그러자 교만했던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하고 겸손히 말한다. 이때 엘리사는 나아만이 강권함에도 불구하고 예물을 받지 않는다. 당시 선지자가 병을 낫게 하고 그 댓가로 식물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고 그 답례를 받는 것은 부정한 수입도 아니고 탐심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대신하는 위치에서, 요즘 흔히 말하는 ‘공인’으로서, 엘리사는 일체 개인적인 욕심을 차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예물들을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아니 엘리사선생님은 왜 저 예물들을 그냥 돌려보내시나? 매일매일 힘들게 생활하시면서. 야, 저 멋진 외투 좀 봐!’ 게하시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서 거짓을 고하고 예물을 취하여 감추어둔다. 엘리사가 그 사환에게 뭐라고 꾸짖고 있는가?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이 말은, 거짓 선지자들이 탐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이 어두운 세대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찌 그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게하시는 결국 나아만의 문둥병에 걸리고 만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발견하고,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 백성에게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엘리사는 비록 자신의 사환이라 할지라도 범죄하였을 때 단호히 정죄하고 문둥병의 형벌을 내릴만큼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부정한 물질의 왕래로 얼마나 혼탁해져 있는가. 이러한 부정한 물질거래가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라 아니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편히 지내기 위해, 공룡처럼 먹어치우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과 같이, 국회의원들, 고급 공무원,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 대부분 충분히 먹고살만큼 가지고 있고, 서민들보다 분명히 혜택을 많이 받아 누림에도 불구하고 무엇에 어떻게 쓰려고 더 욕심을 부리는 건지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기까지 하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 스스로를 위해, 또 이 나라의 수많은 지도층과 권세자들, 재산가들을 위해 회개의 중보기도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살펴보면, 오늘 읽은 왕하6장의 이야기다.
이미 앞 장에서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엘리사의 이적을 살펴본 바 있는 우리로서는 본문에 언급되는 아람 군대의 북이스라엘 침공 사건을 대하게 될 때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들이 정확한 역사적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서술되기보다는 유사한 성격을 지닌 내용끼리 따로 언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여튼 본문은 아람 군대의 북이스라엘 침공과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을 소개하고 있는데, (1)아람 군대의 전략을 미리 간파한 엘리사의 영적 통찰력으로 말미암아 실패를 거듭하는 아람 왕의 모습, (2)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한 이적, (3)사마리아 성안으로 유인되어 남김없이 사로잡힌 아람 군대를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은 그 어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엘리사를 수종드는 자는 눈 앞에 닥친 곤경만 보고 두려워 했으나 엘리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담대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어떤 어려움이 아람군대처럼 진치고 있는가? 그리하여 엘리사의 사환처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는가? 이시간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보자.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이 진정으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란다. 설혹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손으로 여러분을 언제나 지켜 주신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사 자신을 체포하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다가 사로잡힌 아람 군대를 위해 베푼 후대한 조처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는 성경말씀을 실천한 좋은 본보기이다.
이처럼 엘리사는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 담대하고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구체적으로 원수까지 사랑한 사랑의 실천자였다.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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