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점쟁이와 무당

성북동 비둘기 2023. 5. 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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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쟁이와 무당
어스름이 내릴 무렵 텅빈 골목에 혼자 앉아 있던 점쟁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엄상익(변호사)     

 바닷가의 밤이다. 검은 하늘에 하얀 달이 외롭게 더 있다. 창턱에 놓인 사발시계의 바늘이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예전의 일기장을 무심히 뒤척이고 있다. 일기는 나의 영혼을 세월 저쪽의 지나온 시간과 공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순간이동시키곤 한다.

  
  이천육년 새해를 맞이한 지 보름가량 지난 날의 일기에 시선이 멎었다. 나는 스산한 겨울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화동의 정독도서관 앞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도서관이 됐다. 까까머리에 검정 교복을 입고 육년간을 오르내리던 골목이었다. 골목길 한쪽에 가스난로를 피워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점쟁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춥고 쓸쓸해 보였다. 점쟁이란 직업도 마음이 공허한 누군가에게는 한줌의 희망과 위로를 건네주는 건 아닐까.
  
  잠시 후 나는 그 점쟁이 여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앞날을 물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애잔해 보이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손님이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저씨 작년에 건강을 상했겠어요.”
  
  나는 티벳 여행을 갔다 온 후 갑자기 한쪽 눈이 백내장과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을 받고 침울해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 시력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삼 년 후에는 또 건강을 조심해야겠어요. 금이 토를 치는 형상이에요.”
  
  우울한 말이었다. 뜬금없이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겠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나이에 중풍을 맞아 일찍 돌아가셨는데 나도 그럴 것 같아서 무섭네”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하여튼 뭔가 액운이 있는데 조심하란 말이죠. 그리고 아저씨 사주를 보니까 기도하는 팔자네. 무슨 종교를 믿든 열심히 기도하면 그 효과가 대단한 분이야. 그러니까 기도해요. 그러면 앞으로 이십오년 간 좋은 운으로 살 거야.”
  
  그해 여름 나는 백내장의 눈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천 명중 한 명 정도 일어난다는 수술의 후유증을 앓았다. 눈의 미세혈관이 꽈리처럼 부풀어 올라 글씨가 쐐기처럼 보이는 부작용이 생겼다. 삼 년 후 갑자기 멀쩡하던 눈 속에 삽입됐던 인공렌즈가 잘못되어 눈알을 여러 바늘 꿰매는 대수술을 했다. 돌이켜 보면 길가의 점쟁이가 뜬금없이 한 말이 대충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점쟁이는 내가 기도할 팔자라고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었다. 어스름이 내릴 무렵 텅빈 골목에 혼자 앉아 있던 점쟁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몇 년 후 나는 법률업무를 처리해 주는 변호사라는 인연으로 유명한 무당을 알게 됐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이 구름같이 몰린다는 쪽집게 무당이었다. 그 무당은 점을 치는 사람이 가져온 사진을 앞에 있는 청수가 담긴 그릇에 집어 넣으면 거기서 그의 운명을 투시한다고 했다. 손님들이 많아 강남에 빌딩까지 가지고 있다는 용한 무당이었다.
  
  “어떻게 점을 쳐요?”
  나의 사무실을 찾아온 무당에게 호기심으로 물었다.
  
  “새벽에 기도를 하고 영발이 좋을 때 사진을 대접에 담긴 물 속에 넣으면 한 장면이 보여요. 그걸 설명해주는 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모시는 신명이 알려주는 거에요. 장군신이 내게 씌워 알려주시는 거지. 그냥 한 장면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녀는 장군신이라는 존재와 소통하는 것 같았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점쟁이가 등장한다. 사울 왕은 무녀를 찾아가 죽은 귀신을 불러 앞날을 물어봐 달라고 한다. 예언자였던 사무엘이 지하에서 음울한 모습으로 올라와 왕이 죽을 것을 예언한다. 인간은 성령이든 귀신이든 영적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무당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예수쟁이라 성령을 모시고 있어요. 성령과 장군신의 차이를 무당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세요?”
  
  “당연히 성령을 인정하죠. 예수의 영인 성령은 귀신이나 신명의 위에 있는 가장 강한 영이에요. 뒤끝도 좋고 말이죠. 그런데 내가 모시는 장군 신명은 우선 내게 효험은 보여주지만 끝까지 나를 돌봐주지는 않아요. 어느 시점이 되면 나를 내팽개치죠. 무당의 운명이라는 게 그래요. 그러니 성령을 잘 모시도록 하세요.”
  
  길가의 점쟁이한테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다. 또 무당에게서 성령의 존재를 확인받았다. 그들의 말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를 느끼고 전하는 말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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