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은 성경 사도행전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원에 관해 좋은 말씀을 한 신앙의 위인들이 있습니다.
칸트 경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부친이었는데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은 공작이기 때문이 아니요, 현 왕의 부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의 노력에 기인한 선행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보다 종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고자 하는 편이 낫다, 구원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대개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는 보다 넓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뜻인가요?
구원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의 모든 삶에서 구원을 받으며 사는 모든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구원의 과거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로마서 8장 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경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한 여인이 과속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딱지를 떼로 판사 앞에 섰습니다. 이때 판사가 유죄 선고를 하고 100달러 벌금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법복을 벗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100달러를 꺼내어 벌금을 여인 대신에 지급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판사는 그 여인의 아버지였습니다. 판사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용서하고 너 대신 내가 돈을 냈으니 너는 가도 된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갚아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어 주셔서 모든 죄를 지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과거성이라고 합니다.
다음 구원에는 <구원의 미래성>이 있습니다. '구원의 미래성'이란 구원이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3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성경은 우리의 사후에 천국이 존재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천국에서 영원한 영생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이 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나의 행함과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내 스스로 구원을 얻는 <자력구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타력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부상을 당한 한 초라한 군인이 전쟁 후 자신의 삶이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을 링컨 대통령에게 고하기 위해 백악관에 갔습니다. 그러나 백악관 경비들에 의해 저지를 당했습니다. 이때 대통령의 아들 델 링컨이 애원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고 군인에게 다가가서 이유를 묻고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델 링컨은 "아저씨 저를 따라오세요" 하면서 그 군인의 손을 잡고 들어갑니다. 이때 경비원들이 이 사람을 어디고 데려가느냐 묻자 "이 아저씨는 제 친구랍니다. 저와 할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상병은 대통령의 아들 때문에 경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링컨 대통령을 만나 자기의 사정을 아뢰고 대통령의 특별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우리는 죄가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 때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궁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를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구원에는 현재성이 있습니다. 즉 구원이 우리의 오늘의 현실적인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구원의 현재성>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은 구원이란 예수를 믿고 죽은 후 천국에서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 위의 현실의 삶을 살면서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행복한 삶을 알게 되고 참된 인생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나이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놀랍게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 취해 기분 좋은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예수님을 만나고 목적 있는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 주가 된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 편협적이고 외골수라고 반박합니다. 그리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이 동서남북 어디서나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왜 한 길만 고집하는가?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만이 구원주로 믿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또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 없으신 예수님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예수님의 무죄성>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셔야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원죄(original sin)는 쉬운 말로 말하면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죄입니다. 그리고 자범죄(sins)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는 여러 가지 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원죄와 자범죄가 있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그들의 종교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원죄와 자범죄가 없을까요?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의 원죄입니다.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동정녀(처녀를 말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원죄가 없으십니다. 성경 마태복음 1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기 때문에 예수님은 출생부터 우리 인생과 다릅니다. 그래서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본래적인 죄와 무관하신 것입니다.
그다음 살펴볼 것은 스르르 짓은 자범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원죄에 관한 말씀도 놀랍지만 이 말씀도 우리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죄를 한 번도 짓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은 한 번도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한데 어디서 판단하죠? 예 그렇습니다. 법정이지요. 죄의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합니다.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죄가 있다고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고소를 받아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판결은 그 당시 로마의 총독이 재판관이 되고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최고의 법정이 빌라도 총독이 재판관으로 있는 빌라도 법정인 것이죠. 마치 오늘날 대법원에서 판결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 빌라도 총독이 죄수로 끌려온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판결했을까요? 성경 요한복음 18장 3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 나는 그에게서 아부 죄도 찾지 못하노라" 예수님은 그 당시 최고의 법정에서조차 죄가 없다고 인정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어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탁자 위에 커피가 엎질러져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커피를 없애기 위해서는 물기가 없는 행주나 휴지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한 농가 부엌에 우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독사 한 마리가 우유병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뱀은 그 우유병 속에 독을 뿜어 놓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기르는 개가 그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가족이 병에서 우유를 따르려고 하자 현장을 지켜보았던 개가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우유를 마시려고 하자 개가 덤벼들어 우유를 엎지르고 그 우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는 곧 죽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구원이란 십자가에서 무죄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끌어안고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아 그 부인은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는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습니다.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 그놈이 새끼들을 잡아먹을까 봐 꼼짝도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영원히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성경은 아주 중요한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까요? 이 사실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이 부활이 또 우리의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4장 2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장 25절)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이 인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첫째의 관문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살아나심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죽고 우리가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의 이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면 감사-감격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과 우리가 관계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여기에도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3:20)
이 말씀에서 내가 할 일이 있고 주님이 해주실 일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내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인다. 영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이 약속대로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금부터 천국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설교 글을 읽는 분들은 다음과 같이 영접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정말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천국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영접기도>
주님! 저는 제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제 마음 문을 엽니다. 주님 저에게 들어오셔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사람 되게 해 주시고 영원토록 저와 동행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