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설교

나눔의 행복

성북동 비둘기 2023. 11. 7. 22:52
728x90

모신글

히 13:16

옛날 욕심 많은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이 수도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쯤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수도사는 두 사람과 헤어지는 기념으로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른 사람은 앞사람이 소원한 것의 두 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욕심 많은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먼저 소원을 말하면 저 녀석이 나보다 두 배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겠지. 내가 그렇게 큰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암 없고 말구!’ 질투심 많은 사람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 채 서로 상대방이 먼저 소원을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수도사는 이제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욕심 많은 사람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멱살을 잡고 위협했습니다. ‘이 놈아 네가 먼저 소원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질투심 많은 사람은 힘으로 상대방을 당해낼 재간이 없자 눈을 흘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먼저 말하지. 수도사님! 제 왼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질투심 많은 사람은 한쪽 눈을 잃고,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을 다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욕심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아십니까? 돈에 대해 욕심이 많고, 돈에 인색한 사람은 돈을 쌓을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친구도, 이웃도, 심지어 가족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쌓아놓으려고만 하면 많은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하지만 나누어주면 나누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래 전에 음성 꽃동네를 청년들하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정신지체장애자들과 살아가는 봉사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이 존경스러워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일주일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평생토록 함께 하고 계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이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저들을 섬기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때로 힘들지만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 조용히 무릎을 꿇으면 나같이 부족한 자를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 말에 목사인 제가 너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장애인들을 섬기는 저들에게 하늘의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눌 때 행복이 옵니다.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 같지만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눌 때 오는 기쁨은 움켜쥘 때 오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목사님! 나눌 것이 있어야 나누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누지 못할 만큼 갖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음성의 꽃동네가 만들어진 연유를 아십니까? 그 동네에 다리를 절며 밥을 얻어먹고 사는 최귀동이라는 거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최귀동 할아버지는 밥을 얻으면 다리를 절뚝이면서 늘 어디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의 담당 신부님이 참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곳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최귀동 할아버지가 간 곳은 가파른 언덕에 가마니로 엮어서 만든 움막집이었습니다. 몰래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한 거지가 누워 있었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구걸해온 밥을 그 거지에게 먹여 주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다리를 절뚝이며 밥을 구걸해서 살고 있었지만 그 최귀동 할아버지는 자기보다 더 어려운 거지에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부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할아버지같이 장애인도 저렇게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살아왔나’ 생각하고 그 분의 뜻을 기리며 세운 것이 바로 음성의 꽃동네입니다. 그 입구에는 큰 돌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면 빈자리가 생기지요? 그런데 그걸 아십니까? 그 빈자리를 주님이 채우십니다. 채우시되 그냥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눅 6:38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축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차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받은 것을 나누지 않으면 통로가 막혀서 더 이상 채워지지 않습니다. 샘은 수많은 모세혈관과 같은 가는 물줄기가 모아져서 만들어집니다. 샘물을 퍼내면 그 가는 물줄기에서 또 물이 흘러나와 고입니다. 아주 깨끗하고 시원한 물입니다. 그러나 퍼내지 않으면 그 샘은 삼투압 원리로 인해 가는 물줄기가 막혀 버리고 얼마 후 썩어버립니다.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다시 통로로 물질을 차고 넘치게 흘려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쌓아 놓기만 하면 언젠가 그 물질은 마를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멋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월급 타오면 제일 먼저 교육비, 생활비, 세금 등 이런 것을 먼저 떼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월급 타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것, 십일조를 떼어놓고, 감사헌금을 떼어놓고 선교헌금, 장학헌금, 주일헌금, 절기 헌금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가지고 계획을 세워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참 어리석고, 저렇게 하다간 곧 망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더 잘됩니다. 우리 아들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안 믿는 친구들은 십일조도 안 하고, 헌금도 안 하는데, 그 돈 가지고 다 뭐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 공짜가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모르지만 하나님이 채우시되 30배, 60배, 100배로 채우십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나누면 하나님이 더 채우십니다. 행복으로 채우고 물질로 채우십니다.

일본에 미우라 아야꼬(삼포능자)라는 기독교인 여류작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한때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 집 앞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그러나 돈만 벌겠다고 악착을 부리지 않고 오는 손님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봉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 구멍가게는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었고 좋은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어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 올 만큼 번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보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만 번창해서 이웃가게 문 닫으면 어떡하지?’ 이때 이 여사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내 생각만 했지, 나 때문에 이웃이 얼마나 큰 타격을 받고 있는지 생각을 안 했구나!’ 그러면서 자신의 가게 물건을 줄였습니다. 어떤 물건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았습니다. 손님이 그 물건을 찾으면 ‘저 집에 가면 사실 수 있습니다’ 하고 다른 구멍가게로 손님들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그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을 완성시키고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리’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의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강제로 빼앗으려고 할 때 우리는 때로 목숨을 내걸고 항거합니다. 옛날 군사 독재시절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당당히 취할 수 있는 이익이지만 그것을 내가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양보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가지고 계시던 겉옷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나누고 살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성경에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하도를 가다가 불쌍한 노숙자에게 따뜻한 빵 한 조각을 내어 주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길가다 좌판에 과일을 파는 할머니의 과일을 사드리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사먹으라고 돈을 쥐어주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일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나누는 것을 훈련하는 곳이고, 섬기는 것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 와서 대접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자기주장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와서 높아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서로 서로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서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이곳에서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기를 외면한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나라의 아이들을 돕고, 나누고 베풀고 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 서야 됩니다.

감자탕 교회가 유명합니다. 그 교회는 재정의 100만원만 남기고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다 씁니다. 절기헌금 수천만 원 나오면 그것을 다 씁니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나누어 주며 다 씁니다. 이 교회는 돈을 어떻게 쓸까가 늘 고민입니다. 쓰니까 하나님이 그 교회에 또 채우십니다. 바른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지금 교회들이 부흥해서 돈 모으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땅 사고, 교회 짓고, 교회 묘지 만들고, 교회 기도원 만드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웃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교회는 호사스럽게 치장하는데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배당이 너무 비좁고, 비가 새고 낡으면 다시 지어야 겠지요? 그것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멀쩡한 교회를 때려 부수고 호화롭게 궁궐처럼 몇 백억을 들여서 짓는다고 하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이해를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큰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큰 교회가 아니라고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인 교회는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 여선교회도 계획을 세우고, 남선교회도 계획을 세우고, 청장년도 계획을 세우고, 청년회도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돈 걷어서 먹는 일, 노는 일에만 쓰지 말고, 선교하는 일, 베풀고 나누는 일에 써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성탄헌금은 일부 걸식아동을 위해 쓰려고 장로님들과 상의했습니다. 아직도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로 배를 채운다고 합니다. 이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성탄헌금을 드릴 때 이런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을 알고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히 13: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나누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밖에는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누지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한 소녀가 돼지 저금통에 모은 돈을 몽땅 구호단체에 보내며 동봉한 편지가 잔잔한 감동을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살이 많이 쪘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먹을 것이 없어 깡마른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지금까지 나만 배불리며 살아왔구나, 내 주변의 이웃은 배고파 우는데 나는 내 배만 두드리고 살아왔구나!’ 바로 이런 거룩한 부담감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행복은 남을 먼저 생각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시장에 가보면 주부들이 두리번두리번 무엇을 찾습니다. 무엇을 찾을까요? 주부가 먹고 싶은 것을 찾을까요? 아닙니다. 그 주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오로지 식구들을 생각하며 시장을 두리번거립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입니까? 어떤 주부는 생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이 고기를 좋아하니까 생선에 손도 대지 않습니다. 고기를 사와 요리를 해서 그것을 맛있게 먹는 남편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합니다. 남에게 주는 인생,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인생, 나누며 사는 인생, 그렇게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시집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 나오는 시입니다.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주고도 한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언제나 자신을 주는 행위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미소, 나의 기쁨, 나의 재능, 나의 지식 그리고 나의 물건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의 일부를 주는 경건한 행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의 정성과 나의 노력과 나의 시간과 나의 마음을, 더 많이 바칠수록 남에게 더욱 빛나는 선물이 됨을 항시 기억하게 하소서. 나눔은 언제나 겸손의 행위입니다. 당신과 이웃에게 나를 주려할 때엔, 잘난 체 하는 마음 없애시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하고 진실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숨어서도 만족하는 기도의 행위입니다. 자신의 선을 과장하여 떠벌리고 다니거나 타인에게 은근히 보답을 강요하여 인사받길 좋아하는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나눔은 끝없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줄 것이 남는 연인들 의 마음처럼 더 주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더 나누지 못해서 고민을 하는 풍요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주님,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참다운 나눔의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과의 만남이, 영적인 성숙이, 천국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주신 신앙과 은총의 선물만 가지고도 이웃과 충분히 나눌 것이 많은 부자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이승의 순례자 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께 빌려 받은 것임을 항시 기억하게 하소서.’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불교에서 ‘찰나’라는 말을 쓰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눈 한번 깜빡 했는데 내 인생이 벌써 다 가버린 것입니다. 정말 빠르지 않습니까? 2022년이 두 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날 우리 인생은 끝날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사십시오. 나누고 베풀고 사십시오. 그게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다음 주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어주신 날입니다. 한 해를 뒤돌아보며 예수님처럼 한 가지만 이라도 꼭 나누고 베푸는 일을 하고 한 해를 마무리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