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67) 복음의 동역자들(롬16:1-27)

성북동 비둘기 2023. 6. 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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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의 큰 사역자였으나, 그의 사역은 홀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동역자 및 조력자들과 같이 협력하여 이룩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지체된 형제들끼리 연합하여 이룩해야 함을 잘 보여 준다. 이들 바울의 동역자 및 조력자들은 재산으로 또는 학식으로 아니면 생명을 건 봉사로 바울을 도왔다.

 

바울이 동역자라고 부른 여러 명의 사람들을 이미 앞 부분에서 살펴보았다.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 디도, 마가, 그리고 누가 등이다. 그러나 이보다 덜 알려진 동역자들도 많이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0명 가까운 인물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가족들과 형제, 자매, 친척 등 다양한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외에도 바울 서신에 보면 더 많은 동역자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오늘은 롬16장에 등장한 동역자 중 몇 사람만 살펴보도록 한다.

 

뵈뵈

 

바울은 서신을 마감하면서 제일 먼저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여성 신자를 로마 교회에 추천한다. 이로 보아 아마도 뵈뵈가 로마로 여행하는 길에 이 바울의 편지를 로마 교회에 전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남쪽 약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린도의 외항으로 당시 고린도와 마찬가지로 지중해의 해상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번화하였으며 이교숭배도 매우 융성한 도시였다.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이곳에서 그의 서원에 대한 이행으로 머리를 깎은 기록도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18:18).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섬기는 사람 혹은 집사)이었다. 또한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뵈뵈가 다소간 부유하거나 혹은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어서, 바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물질적 지원을 받기를 거부한 반면, 뵈뵈가 제공한 도움은 아주 공공연하게 감사히 받았다. 뵈뵈는 마침 로마로 업무 여행을 가려던 차에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런 뵈뵈를 천거하면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도울 것을 권면하고 있다.

 

뵈뵈(포이베)라는 이름의 뜻은 빛나다, 밝게 비추다라는 뜻으로 본래 이교도의 신화에서 연유했다. 즉 이 이름은 여신의 이름으로 이 여신은 아르테미스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로마의 다이아나 여신과 같은 달의 여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으로 인해 뵈뵈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대교회에는 나그네들이나 특히 전도를 위해 순회하는 여행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관례가 있었다. 이는 도덕적 성결을 위해 당시 성적 타락의 온상이었던 공공 숙박시설이나 공중 목욕탕같은 공익 시설을 이용하는 것을 피했던 그리스도인들간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봉사적 일에 전혀 잡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벧전49에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권면하고, 또 본절에서 바울이 구체적으로 예절소용되는 바라는 표현을 사용해 심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부탁하는 점이 그것을 증거해 준다.

 

여집사 뵈뵈의 헌신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실제로 교회 역사에 있어 여성들의 활약은 결코 남성들에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과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하는 온갖 편견과 불평등, 차별을 제거하는데 가장 앞장서 왔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아직 여성과 미성년자,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남녀 차별과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집단이 바로, 유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바로 이 종교집단이다. 세상의 변화에 한참 뒤져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기본정신에도 어긋난 부분이 너무나 많다. 더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나와야 한다. 더 많은 여성도들의 헌신이 교회는 필요하다. 우리 동산교회도 뵈뵈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에배네도

 

에파이네토스이것은 칭찬을 받을만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인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방에서 전도하는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로 여겨진다. 그는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심한 자였다. 그후 자연스럽게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 교회에 속해 함께 일을 도우면서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 수고한 것으로 보인다.

 

에배네도를 가리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 많은 사람의 열매가 맺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암시한다. 또한 바울은 그를 가리켜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에배네도가 아시아의 첫 개종자로서 주의 사역에 대해 열심히 있었으므로, 바울이 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우리 가정, 집안에서 복음의 처음 익은 열매가 아닌가? 여러분을 통해 귀한 복음의 역사가 가정에 넘쳐나기를 기원한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친척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게네이스는 문자 그대로 친척을 의미하기보다는 9:3에서처럼 골육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동료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누구에게든지 친척이라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특별히 친척이라 호칭된 사람들은 바울과 보다 긴밀한 관련을 맺은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이들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고 소개한다. 여기서 함께 갇혔던으로 번역된 헬라어 쉬나이크말로투스는 직역하면 전쟁에서 함께 포로된 자란 뜻이다. 그들이 바울과 함께 언제 감옥에 갇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당한 여러 번의 투옥 사건 중 한 사건에서 함께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그들의 믿음과 봉사로 인해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복음 사역을 돕는 사도들에게도 잘 알려졌을 정도로 특별히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서부터 일찍 회심하였기에 지도자로서 알려질 시간상의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졌으며 또한 사도들의 무리와도 쉽게 연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하였으나,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활동했던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신앙을 먼저 가지고 교회에 먼저 출석한 것은 주님께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겸손히 섬기는 자세를 갖자.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아리스도불로는 헤롯 왕의 손자였으며, 아그립바와 형제였다. 당시 그는 로마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으며 또한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의 친구요 추종자였으며, 그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가 족은 다음 가의 집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황제의 집안에 귀속되어 그들의 신분이 유지되었고, 그의 집안의 노예들과 자유인은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혹자는 그들 가족 중의 일부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라고 추론한다. 즉 바울은 그의 권속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리스도불로 아래 있었던 노예들과 일꾼들이었을 것이다.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나깃수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어스 나르킷수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노예의 신분으로 있다가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권모술수에 능한 부자였다고 한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자로, AD54년 네로가 즉위한 직후 네로의 모친 아그리피나의 미움을 사서 그녀의 명령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 후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의 노예들은 황제의 소유로 예속되었는데, 황제 가문의 다른 노예와 구별하기 위하여 나깃수에게 속한 모든 노예들에게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처럼 나르키시아니라는 명칭을 붙였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극악무도한 나깃수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그 권속들 중의 일부의 노예와 가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온갖 종류의 사악으로 들끓는 나깃수의 집에까지 들어간 것은 의미가 깊은 일이며 놀랍고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어쨌든 바울은 나깃수의 권속에 속한 종들로서 그리스도인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하고 있다. 이렇듯 바울 사도는 그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문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가정형편이 영적으로 심히 고달프고, 가족들 가운데 극심한 박해가 있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승리하자.

 

대서자 더디오

 

테르티오스셋째를 의미하는 로마식 이름이다. 그는 로마 독자들에게 알려진 인물로서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바울의 편지를 대필해 주었다. 위스트(Wuest)는 바울이 대서자를 두게 된 이유를 갈4:13-15에서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언급하면서 갈라디아인들이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말하는 것에 근거를 둔다. 즉 그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시 밤빌리아 땅에서 옵달미아라는 동양의 눈병에 걸렸을 것이며, 이 눈병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때 그 광채로 인해 눈이 감긴 후 며칠을 눈을 못 뜨게 되었던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안질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바울은 전문 대서자를 두었고, 그가 모든 글을 썼으며, 자신은 맨 마지막에 서명을 하고 때로 필요한 말을 첨언하기만 했다. 하지만 본 절의 더디오는 대서자의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경우로 1인칭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보내는 것이 특기할만하다. 아마도 이는 바울이 더디오 스스로 문안을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그렇다면 이것은 대서자를 단순한 고용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동역자로 대우한 놀랄만한 행위이다.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 재무 에라스도

 

여기서 가이오는 마게도니아의 가이오가 아니며, 더베 사람 가이오도, 요한 삼서에 언급되어 있는 가이오도 아니다. 본 절의 가이오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행18:7디도 유스도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여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로 본다. 그러므로 가이오는 바울의 고린도 전도 사역에서 첫 번째 회심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머물러 있었던 집 주인이기도 하다. 본 절에서 그를 가리켜 온 교회 식주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 당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또한 그의 집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집회 장소로 개방되었음을 암시하며 아울러 가이오의 집이 고린도를 방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개방되고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여기서 식주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크세노스로 처음에는 초청된 친구라는 뜻이었다가 후에는 나그네’, ‘외국인또는 본 절과 같이 나그네나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환대하거나 영접하는 사람으로 집 주인의 의미로 바뀌었다. 특히 여기서 바울이 가이오를 자기가 머물렀던 집 주인으로 언급한 것은 이 서신을 겐그레아나 또는 마게도냐의 어떤 지역에서 쓴 것이 아니라 고린도에서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 시의 재무관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극장의 지배인, 관리인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는 도시의 재산 관리인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고린도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교회가 사회적 저명 인사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에라스도가 다른 신약성경에서 언급되어 있는 에라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이 이름은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이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업에 힘쓰던 성도들이다. 즉 바울의 선교 사역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문안인사를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혹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거듭 덧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업에 힘쓰는 사람들은 주의 종이 증언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쳐 주의 일에 힘쓰며, 주신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여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 5절에 나오는 저의 교회14,15절에서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라는 말은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보다는 성도들의 가정집을 정규적인 회합의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즉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한 도시에 몇 개의 가정교회들이 모여 하나의 지역교회를 형성했는데, 마가의 다락방, 빌립보에 있는 루디아의 집,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집,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의 집(4:15) 등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교회들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라고 말한 것도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던 가정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14,15절에서 두 무리의 신자들에게 문안하면서 그들과 관계있는 신자들에게까지 문안을 확대하는데 이는 그 두 무리의 신자들에게 문안하면서 그들과 관계있는 신자들에게까지 문안을 확대하는데 이는 그 두 무리가 각각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가정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속하는데, 가정집에서 모이는 개척교회나, 한 지역에 사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구역 예배, 교구 예배 등이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특별히 오늘날의 성도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정집에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돈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을 본받아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사랑과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돕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이름들에는 로마인도 있고 노예의 소유주도 있으며, 노예도 있고 헬라 이름을 가진 자도 있고 로마 이름을 가진 자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바울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로서 따뜻한 사랑을 표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장점을 들어 안부를 전하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이다.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으며, 모두가 주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한 형제요 자매이다. 특히 여자의 이름과 노예의 이름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26명의 이름 중에서 7명이 여인이며, 그 외에도 어머니나 자매도 등장한다. 또한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나깃수의 권속은 노예들과 일꾼들을 말하는 것이며 율리아도 귀족의 여자 노예의 이름인 듯하다. 여기에 바로 종래의 세계와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며, 신분의 높고 낮음을 초월하고, 성별의 주종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이라 일컬어지며,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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