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성경인물설교(5) 아브라함(창25:1-11) / 박영철 목사

성북동 비둘기 2023. 6. 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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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없다.

 

아브라함은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의 최초 조상이 되고,

 

영적으로는 구약 선민에 대응하는 신약 선민인 교회, 즉 모든 믿는 성도들의 조상이 된다.

 

셈의 후손으로 데라의 아들이었으며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언약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하나님과 최초로 할례언약을 체결한 사람이다.

 

이복 누이동생 사라와 결혼했고,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개명되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갈대아 우르에는 우르(남무) 왕조가 번성했으며,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가 흥왕했다.

 

당시 일곱 성읍의 수호신들을 비롯한 3600여 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합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아브라함은 이렇게 어지러운 다신 숭배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려가긴 했지만, 셈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던 집안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교도들의 다신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아브라함의 집안은 갈대아 우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본래 고향인 하란으로 돌아와 머물게 된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계속해서 그 부근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후일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지금도 하란의 서쪽에는 아브라함 탄생기념 사원이 있다.

 

하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모르나, 아브라함이 75세 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그런데, 하나님의 그 지시에는 약속이 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2-3) 그는 우르 땅에 살 때에 사람들이 거짓 신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가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고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가나안 땅에는 이미 여호와를 모르는 토착 정착민들이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역시 많은 신들이 있었다. 가나안의 주민들은 하나님을 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바알을 비롯, 땅의 여신 아세라와 음란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의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부족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쉽게 해석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신앙적으로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자신만을 믿고 먼 길을 따라온 가족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처했다. 가장인 아브라함은 엄청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냥 버틸 것인가? 아니면, 일단 애굽으로 내려가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곤궁에 빠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애굽으로 내려갈 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벗어나 이방 땅 애굽에서, 아내 사라까지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고심한 모습은 있으나 하나님께 매달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자리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도록 아내와 조카에게 얼마나 입조심을 시켰을까? 비겁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와 조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건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자칫하면 우리 모두 다 죽어. 사실 나도 마음이 아프다구.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나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구.”

 

그는 자신의 거짓말을 열심히 합리화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체면도, 자존심도 버렸다. 거짓말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을 것이다.

 

애굽 왕에게 아내를 바친 대가로 아브라함은 양과 소, 노비와 나귀, 약대를 얻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아무리 호의호식을 해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실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한 거짓말이 실제로는 자신을 죽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살았으나 살아 있다고 차마 말하기 어려운 상황. 그에게 남은 건 수치심과 무능함뿐이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신다. 이기적이고 변덕스런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건져내시고 아내를 다시 찾게 해 주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의 무능함과 비참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창세기 12장 첫장면에서, 왜 성경은 믿음의 조상답지 않은 초라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을까? 이것은, 비록 믿음의 조상이라고는 하나, 선택받은 사람이라고는 하나, 인간인 이상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고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장래를 열어주고 계심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후일, 그랄 땅에 거할 때도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범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어 위경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후손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강요에 못이겨 인내하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인간적 방법으로 서자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그의 후손인 아랍 계열의 민족들과 적자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후대에 영원한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두라라는 후처를 취하였는데,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두라의 후손은 구약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대표적인 이방민족(미디안 등)으로 출현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동문제의 근원적인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애초부터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인가? 스스로 이만한 믿음이면 괜찮지 하고 자평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끄시지 않으시면, 온전한 믿음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음을 이 시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2:8,9).

 

왜 성도들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겸손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고 내어주는 삶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인지를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결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부족하지만 믿음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시켜간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시고 다듬고 인도하신 결과이다. 이시간 아브라함의 성품 가운데 특히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몇 가지 알아보자.

 

1) 조카 롯과 분리할(13) 때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

 

자신과 조카 롯의 소유가 점점 늘어나서, 자신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되었을 때, 롯에게 먼저 거주지 선택권을 부여한 풍부한 아량과 관용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좀더 좋은 위치, 좀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현대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성도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본받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삶에 찌들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포기하면 다툼은 일어나기 어렵다.

 

2) 소돔땅에 거하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84,BC2082/14)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

 

가족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침략자를 추격하여 가족을 찾아오는 모습에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소돔 왕의 대적자들을 물리쳤으나 빼앗은 물품을 소돔 왕으로부터 전혀 취하지 않은 청렴결백한 모습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 물질 앞에서 고귀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또한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치는데,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하는 성도들에게 또한 귀감이 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3) 멸망당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18) 아브라함의 모습

 

죄악된 소돔성을 심판하기 위해 천사들이 떠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서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조카 롯을 위해 간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은, 특별히 태신자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과연 죽어가는 불신자들을 위해 얼마나 애써 중보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다시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낯설은 손님일지라도 정성으로 대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돔성으로 가는 천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성도들도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사랑의 경로식당, 사랑의 도시락 배달을 통해 지역사회 노인들과 거택보호대상자들을 우리가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분은 쓸데 없는 일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와 피를 나누지도 않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경제적으로 볼 때, 투자를 해봐야 별로 소득도 없는, 그래서 외면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이 정성으로 지역의 어르신들, 소외된 분들을 대접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4) 모리아산 제사(22)

 

아브라함의 성품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대 순종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아간 것이나,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순종한 모습은 정말 믿음의 조상다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마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이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렸을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25장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향년 175세에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살아 움직일 힘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살고 있지만,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오늘 밤에라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인가?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일지 이시간 스스로 점검해보자.

 

그날, 그 순간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자.

 

비록 부족한 사람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듯이, 우리 역시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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