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설교(31) 욥(욥1:1-22) / 박영철 목사
● 성경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인생이란 고된 훈련장에서 연단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를 비롯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 훈련장의 혹독한 고난 가운데서 정금같이 나온 사람들이다. 특히 오늘 살펴보는 욥은, 가장 극심한 인생의 고난을 인내로 이겨낸 대표적인 신앙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욥을 가상 인물로 보기도 하나 성경은 분명히 실재 인물로 언급하고 있는데(겔14:14,20, 약5:11), 에스겔은 그를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대표적인 의인으로 보고 있으며, 야고보사도는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욥의 생존 시대에 관해 성경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이유를 근거로 그가 아브라함과 동시대인 족장시대를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 욥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주는 욥기에 출애굽사건은 물론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에 준하는 종교의식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욥은 모세 이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2) 욥은 시련을 통과한 후 140년을 더 살았다고 하는데 결국 그가 산 연수는 약 200년 안팎이었을 것인바, 사람이 이렇게 장수하던 때는 초기 족장 시대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인물이었을 것이다.
3) 욥의 부귀의 정도가 금이나 은보다는 가축의 수효로써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족장시대의 관례와 일치한다.
4)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욥 또한 자기 가문의 제사장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5) 족장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엘샤다이’였는데, 욥기에도 이 호칭이 무려 31회나 사용되고 있다.
‘욥’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그동안 여러 가지 주장이 있었다. 히브리어로는 ‘핍박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아랍어로는 ‘돌이키다, 뉘우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면, 주전 이천년대 전반, 즉 족장시대에 ‘욥’이란 이름은 상당히 흔한 이름으로 ‘아버지가 어디 계신가?’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욥은 우스 땅에 살았다고 하는데, 우스땅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불명확하나, 풍습과 어휘, 지리적 언급, 역사적 배경 등을 살펴볼 때, 대략 북아라비아(아라비아 북부 사막) 지역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본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그는 유복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소생은 아들 일곱에 딸이 셋이었고, 그의 소유물은 양이 7천, 약대가 3천, 소가 5백겨리(1천), 암나귀 5백, 종도 많았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자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의롭게, 순전하게 살려고 하는 욥에게 시련이 닥쳐온다. 물론 이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이었다. 그런데 욥을 연단시켜 믿음을 완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사탄을 하나의 도구로 쓰신 것이다. 사탄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대적이다. 지금도 우리가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훼방꾼이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게 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행동하게 하는 배후 조종자이다.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은 보잘것이 없어 이 마귀의 조종에 놀아나기 쉽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사탄을 필요에 따라 이용하여 은혜의 도구로 삼으신다. 사탄까지도 은혜의 수단이 된다면,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다. 단, 믿음의 눈이 열려야 그것이 보인다.
그런데 욥은 결코 불신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였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욥기는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연단을 받아 마음이 더욱 정결해지고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욥에게 찾아온 연단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박탈이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욥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소유물을 빼앗겨 알몸 신세가 되었다.
1. 재산
먼저 1천마리의 소와 500마리의 암나귀를 빼앗고, 이어서 7000마리의 양을 빼앗고, 마지막으로 값진 3000마리의 낙타를 빼앗겨 그는 무일푼이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의 소유물 중에서 이것만은 놓치지 않겠다고 움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때문에 온전히 헌신된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받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소유물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제단에 바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2. 자녀
욥이 재물 다음으로 빼앗긴 것은 10명의 자녀들이었다. 요즘은 자녀들이 우상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구세군 창시자 부스 대장은 자식들을 앞에 불러 놓고, “여호와 하나님, 만일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어서 불러가 주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몰론 이 기도에 응답을 받고 못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아버지의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부스 대장은 아버지로서 이렇게 기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내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고, 잠시 우리에게 맡겨놓으신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소중히,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키워야 하되, 그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3. 건강
욥은 타고난 육체의 건강도 빼앗겼다.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전신을 뒤덮은 악창은 소위 ‘바그다드 부스럼’(Bagdad boil)이라는 피부병이다. 동양종기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 이 피부병은 중동 지방에서 발병률이 높다. 병에 감염되면 처음 두 주간 동안은 피부가 자주빛으로 변하다가 점차 검게 되고 상처 부위에 단단한 껍질이 앉게 되며 이때 심한 가려움증이 동반된다. 욥이 상처를 기와 조각으로 긁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병이 더 진전되면 피부 뿐 아니라 입, 코, 목구멍의 점막에도 감염되며 부스럼은 궤양이 되어 고름이 나온다. 또한 몸의 상처에 파리들이 알을 낳아 구더기가 생겨나 상처 부위를 썩게 만드는데 그 처참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요즘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는데, 웰빙의 핵심은 건강한 생활이다. 건강이 인생의 목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하지만, 신앙에서는 그 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육에 의지하면 영이 멀어지게 된다. 육체가 몹시 연약할 때 오히려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일이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건강 자체가 우리 온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고 있나? 두 눈이 성한 것보다, 한쪽 눈이 뽑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고, 두 손이 성한 것보다, 한쪽 손이 잘려 불구자가 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천번만번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두 눈이 성한채, 두 손, 두 다리, 온 육신이 성한채 지옥불에 던져진다면, 그 건강한 육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4. 아내의 사랑
재물과 자식과 건강을 빼앗긴 욥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아내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아내의 사랑도 욥에게서 떠나버렸다. 아내는 전신이 피부병으로 덮이고 빈털터리가 된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다. 욥의 입에서는 죽음의 냄새만이 풍겨올 따름이었다. 욥의 아내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해 놓지 않았다. 아내가 욥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지, 아니면, 계속 욥 곁에 남아있었는지 불분명하다. 사실 부부는 남남이다. 남남이 서로 만나 사랑과 신뢰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신뢰가 사라지면 부부는 다시 남남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내의 사랑, 남편의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우리는 믿고싶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의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5. 친구
욥은 이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으나 결코 하나님을 원망치 않았다. 그때 욥을 찾아온 세 사람의 친구가 있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욥의 심사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욥은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한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늘 좋은 친구를 고대하고, 변하지 않는 우정을 소망한다. 그리고 그 우정에 기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정이라는 것 또한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가를! 일생에 진정으로 자신을 믿어주고 끝까지 지지해 줄 친구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평소 욥 주위에는 친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겠는가? 하지만, 우환과 고뇌의 순간에 그에게 달려온 친구는 단 셋이었고, 그나마 저들도 욥의 진정한 친구라기보다는 논쟁자들이었다.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구주 예수님밖에는 없다.
6. 존경과 사랑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 욥이 잘 살 때에는 이웃의 사랑과 존경이 따랐지만 병든 거지 신세가 되자, 사람들은 언제 봤냐는 듯이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욥은 스스로 한탄했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척은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 종들은 나를 죄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해야 하겠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19:13-19)” 욥은 이제 천애고아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 것이다.
7.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도 욥을 떠나신 것 같았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칭찬하시던 하나님은, 욥의 목쉰 기도에도 묵묵부답이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더라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들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고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부르짖고 있는 욥의 소리에 침묵하고 계시다.
이보다 더한 박탈감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볼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아니시다라는 말보다 더한 절망감이 어디 있겠는가? 욥은 이 절망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침묵까지 철저히 경험한 사람이다.
● 그런데, 인생이란 존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알몸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없이는, 진정한 종말론적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예외없이 이 땅에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그날,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그 어떤 것도 내 손에 잡고 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그날, 여러분이 무엇에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재산인가? 자녀인가? 건강인가? 아내의 사랑인가? 친구인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인가? 그 어떤 것에도 여러분은 의지할 수 없다. 아무리 돌아보아 그것들은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없다. 오로지 벌거벗은 알몸 그대로, 불꽃같은 하나님 눈동자 앞에 서야 한다.
하지만, 욥은 알몸의 상태로, 절망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침묵까지 철저히 경험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욥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의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결국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폭풍 가운데 말씀하신다.(42:5,6)
인간은 하나님께 접했을 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마련이다. 욥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의 그 모든 의로움도 선행도 순전함도, 모든 재물과 소유물도 한줌의 먼지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욥은 자신이 완전히 깨어져 무(無)가 되었을 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심지어 자신의 적대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열어 보이신 최대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전부를 보여 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십자가 아래 설 때,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못 박아 죽일 때, 비로소 온전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누가 진정으로 의로운 자인가? 십자가 아래에 서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진 비바람 속에 욥을 연단하여 끝내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십자가 아래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신앙을 회복하자.